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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민 사진展
『 Seeing the Unseen 』
M.CHEONGOK_09_109x109cm/55.5x61.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2
LEE C GALLERY
2013. 11. 7(목) ▶ 2013. 11. 22(금) Opening 2013. 11. 7(목) 오후5시 서울시 종로구 팔판동 128번지 | T.02-3210-0467~8
www.leecgallery.com
리씨 갤러리(Lee C Gallery)는 2013년 11월 7일부터 11월 22일까지 조상민 『 Seeing the Unseen 』 사진전을 개최한다. 조상민은 오랫동안 아날로그 작업을 이어오면서 특히 흑백사진작업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조상민의 『 Seeing the Unseen 』 시리즈의 특징은 “실루엣의 도입”에 있다. 자연이란 “끝과 경계”가 없는 공간을 향하여 작가는 실루엣이라는 경계를 도입함으로써 자연을 드러내려하고 있다.
“바다와 숲의 풍경에 있어서 불필요한 형태나 디테일을 생략하고, 사물의 덩어리와 톤의 변화에 의한 ‘풍경과 실루엣’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려 하였다.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와 아웃라인으로 표현된 풍경은 때로는 명확한 형태와 톤으로 보이거나 때로는 어두운 실루엣이나 옅은 톤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것_들에 의해서 확실해지는 것_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노트)
이렇듯 그의 작업에는 자연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바다와 산과 구름, 하늘, 숲, 나무가 등장하나 이러한 대상들은 실루엣속에 흑과 백의 대비와 함께 세부디테일이 억제되어 표현되어 있다. 화면속의 실루엣은 “자연”을 드러내기 위한 불가시적 장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모두 중형필름으로 작업하고 파이버베이스 인화지에 직접 인화한 젤라틴 실버프린트를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모처럼 정통 흑백사진의 깊이와 함께 사진적 해석과 가능성에 대한 도전을 계속하고 있는 그의 작업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시리즈는 사진전에 맞춰서 사진집도 함께 발간될 예정이다.
F. WONDAERI_09_109x109cm/55.5x61.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2
조상민의 사진_무한의 세계를 향하여_
평론가 치바 시게오(千葉成夫)
사진이라는 기술이 19세기 실용화 된 이후로, ‘사진’이란 현실을 찍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휴대폰에 카메라 기능이 탑재된 지금,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간단히 눈앞의 현실세계를 촬영하고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은 ‘그저 사진’일 뿐, A씨와 B씨 중 누가 촬영하였는지를 구별하기위한 판단의 기준은 카메라의 성능, 즉 카메라의 기술적 차이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누구나 고성능 디지털카메라로 셔터를 누르고 있지만 카메라가 향하는 곳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충실히 재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사진은 현실에 종속되고 만다. 다시 말하면 ‘현실을 찍는다’라는 것이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사진가는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그러한 고정관념과는 전혀 반대를 지향하는 것, 지금 이것만이 “작품으로서의 사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조상민의 “Seeing the Unseen"시리즈는 바다, 산, 구름, 하늘, 숲, 나무를 촬영대상 즉, 회화에서 말하는 ‘모티브’로 하고 있다. 자연의 ‘地, 水, 火, 風’중에 ‘火’가 없지만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자연을 향해 그저 셔터를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바다, 산, 구름, 하늘, 숲, 나무 그대로가 ‘자연’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명확하게 ”자연이란 확실하지 않은 것에 의해 확실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 산, 숲을 보고 ”아, 자연은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바다가, 산이, 숲이 아름답다, 바다의, 산의, 숲의 풍경이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바다와 숲을 겉으로만 본다고 하면 조상민은 바다와 숲의 풍경 안에서 ‘자연’을 보려하고, 나아가 그것을 표현하여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려 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망막위에 투영되는 이미지이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지를 풍경으로 환원시킨다. 바다와 숲을 보면서 우리들은 진정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가? 어디가, 무엇이, ‘자연’인가? ‘자연’이란 무엇인가? 그의 사진은 이러한 질문 그 자체라고해도 좋을 것이다.
F. WONDAERI_95x9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2
‘자연(地, 水, 火, 風)’의 본질적 특징은 “경계/끝”이 없다는 것, 윤곽을 갖지 않는다는 것,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확실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늘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이라고 하듯이 ‘자연’이란 ‘무변(無邊)-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육지-地’와 ‘하늘-空’사이의 경계를 갖는 ‘산’을 모티브로 하거나 ‘육지-地’나 ‘하늘-空’과 경계를 갖는 ‘바다’를 도입하거나 한다. 이러한 ‘경계’ 즉 ‘윤곽’을 도입하지 않으면 ‘자연’을 한정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도입-導入’의 방법이 독특한 점은 쾌청한 하늘에 우뚝 솟은 한라산과 눈부시게 파란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도의 관광사진과는 전혀 다른 점에 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표면상의 아름다움을 넘어 바다와 산 그리고 숲을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궁극적 표현을 추구함으로써 ‘자연’을 나타내려 하고 있는 점이다. 광대무변한 ‘자연’을 표현하려면 나름대로의 전략이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수동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라도 눈을 뜨면 쾌청한 하늘에 우뚝 솟은 한라산과 제주도의 푸른 바다가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망막위에 비춰지는 이미지에 불과할 뿐, 아직 ‘자연’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가는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 ‘보는’ 세계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위해서 조상민은 어떠한 촬영방법을 구사하고 있는가? 전형적인 구도는 다음과 같다. 화면의 아래 반은 산과 육지의 실루엣으로 세부디테일은 구분하기 어려운 덩어리로 처리되어 있다. 그리고 화면의 위쪽 반은 바다(혹은 하늘, 구름, 섬)으로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옅은 톤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렇기에 위쪽 이미지도 세부디테일이 명료하지는 않다. 즉, 첫째로 필히 실루엣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두 번째로 흑과 백의 톤이 대비를 이룬다는 것, 세 번째로 전체적인 세부디테일의 표현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실루엣의 도입-이번 시리즈에서 이것이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이 실루엣의 도입은 매우 인상적이다. 전부를 보여주지 않는 것, 혹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보이게 하는 것.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이미지의 시각체계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전환하려 하고 있다. 실루엣의 윤곽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숲의 나무들이다. 그것이 숲이고 산이며 육지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전부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 정도는 보인다. 아니 거의 보이지 않고 부분만 보인다. 공연장이 어두워지고 무대를 보면 무대 앞 반이 아직 반쯤 어둡고 윗부분 반은 부드럽게 빛이 닿고 있다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어렴풋이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그런 느낌이다. 그러니까 바다, 산, 구름, 하늘, 숲, 나무라는 모티브 속에서 “자연”이 드러나도록 어떤 장치와도 같이 어느 정도 불가시적(不可視的)인 부분을 두고 있다고 할까.
그렇다고해서 위와 아래가 물과 기름과 같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느낌은 전체적인 구성이 흑과 백의 톤으로 구성되어 있고 세부 디테일표현이 자제되어 있기에 들 수 있는 느낌이다. 양자는 분리이면서 연속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서 사진의 위쪽 상부는 또 하나의 실루엣 예비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애매(曖昧)’라든가 ‘몽롱(朦朧)’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면 그의 작품의 특성은 거기에 있다고 하겠다. 눈으로 명쾌하게 명확히 보이는 모든 것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이다. 한라산과 제주도의 바다도 사물로서 보거나 촬영하는 한, 그것은 “사물로서의 풍경”에 불과할 뿐 “자연” 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란 “공간”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연”이란 “공간”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사물”은 하나의 덩어리이지 공간이 아니다. 그 덩어리가 소멸하면 사물은 끝이다. 사물이란 무한의 넓이 속의 작은 유한에 불과하며 소멸하면 흔적도 없이 “그 곳”(덩어리가 있던 자리)에는 다시 무한의 넓이 즉, “자연”이 자리할 뿐이다.
조상민은 “자연”이란 그러한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바다, 산, 구름, 숲, 나무가 품고 있는 “자연”을 표출하려 한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명쾌하며 명확한 것이 아닌 애매하며 몽롱한 것에 근거하게 된다. 명쾌하며 명확한 것은 덩어리일 뿐, 그것으로는 “자연의 넓이”를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SOYANG #14.2012_95x9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2
조상민의 작품에 대해 이러한 생각에 잠길 즈음, 갑자기 바다도 섬도 산도 구름도 등장하지 않는 “숲”만의 사진, 이 매력적인 “숲”의 사진은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부분의 사진은 숲의 밖에서 숲을 향해 셔터를 누른 것이 아니라 숲의 한가운데 시점에서 촬영되어진 것들이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나무사이로 살짝살짝 보이는 “하늘”의 표현방법이다. 일반적인 촬영이라면 숲의 저쪽은 하늘이라고 알 텐데 그렇지가 않다. 지극히 애매하며 몽롱하게 표현되어 있다. 숲의 반대편은 하늘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예를 들어 스튜디오에 “숲”을 가져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숲의 배경을 회색의 거대한 천으로 만들어 촬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톤의 표현을 통해 그러한 효과를 내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들은 실루엣으로 된 앞쪽의 나무부분이 실루엣임에도 불구하고 세부 디테일이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숲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는 부드러워지고 동시에 세부 디테일은 불분명해진다. 즉 톤은 옅지만 분명히 실루엣임에 틀림없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앞부분은 이제 실루엣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까운 것은 잘 보이고, 멀리 있을수록 몽롱해져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의 작품은 배경에 하늘이 없는 관계로 뒤쪽의 나무와 배경이 서로 자연스럽게 서로 융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뒤쪽에서 앞으로 공간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진이나 그림과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흘러넘치는 공간은 가장 앞쪽의 세부 디테일이 명확한 나무로부터 보고 있는 내가 있는 곳까지 흘러 넘쳐 오는 것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이 작품의 앞에 서있는 나는 그렇게 작품의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러한 감정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끝이 없는 자연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실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 장의 사진작품을 보고 있을 뿐인데 나의 “視-봄”은 “본다”라는 범주에서 분명히 벗어나고 있다.
따라서 바다, 섬, 육지의 작품에서 나의 “視”는 바다의 저편으로, 섬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空”이라고도 “虛”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하며 몽롱한 광활한 저 곳을 향해 사라져간다.
“視”가 “自然”을 체험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연”이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광활함을 본질로 하는 “자연”은 이미지로서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시각”이란 “자연이란 광활함”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자신 속에 가둘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각”만이 가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거기에 사진만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눈”은 현실세계를 보기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O.YEONGAAK_02_109x109cm/55.5x61.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3
조상민-심안으로 보는 자연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풍경은 대기 속에서, 시간과 빛의 번짐과 소멸 속에서 수시로 뒤척인다. 따라서 풍경은 한시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한 변화의 과정 안에서 순환을 거듭한다. 조상민은 그 변화의 한 복판에서 고즈넉이 시간의 고리와 윤회의 섭리에 순응하는 자연을 응시한다. 아니 한 순간의 자연이 영원처럼 고정된 지점을 포획한다. 그는 그만의 서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가 찍은 것은 특정한 자연대상이 아니라 실상 그 자연을 감싸고 있는 대기감과 시간, 빛, 공기의 무게 등이다. 그러한 것들로 인해 착색 된 자연이자 그 힘에 의해 새롭게 변형된 자연의 실루엣이다.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공기와 바람, 안개와 습기, 빛과 기온 등이 산과 물, 나무와 풀을 가리고 덮고 지우고 누르는가 하면 그것들을 또 다른 영성적인 존재로 치환한다. 작가는 생명체인 자연이 대기의 변화와 빛의 변모에 따라 미묘하게, 신비스럽게 모습을 바꾸며 생성적으로 활성화되어가는 추이를 섬세하게 따라가 본다. 세계는 그렇게 운동태고 생성중이며 활기찬 기운에 의해 스멀거린다. 그러니 그는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예술은 보이지 않는 것에 보이는 존재를 부여해 주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사진에 있어 중요한 것은 대상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이다. 그는 전통적인 촬영과 인화과정을 고수하면서도 회화적 앵글과 흑백의 섬세한 화면을 통해 이른바 ‘동양적인 감수성’이라 칭할만한 분위기를 건져 올린다. 자연으로 인해 형성된 미적 경험일 것이다. 그 경험의 근원에는 동양인의 자연관과 심미관이 오롯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그는 그 인식소를 가지고 자연을 바라보고 느낀다. 납작한 흑백사진 속에는 산과 나무, 숲과 바다가 적막하게 놓여있다. 흑백의 농도 차이에 의해 화면 안에는 몇 겹의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마치 수묵화가 보여주는 먹의 유현한 농담변화와 유사하다. 그것은 멋지고 미묘한 흑색과 회색의 단색조로 전개된 평면이다. 사진의 미덕인 명료성과 인증의 힘으로서의 이미지보다는 인화지 위에 빛이 스며들어 밀착된 흔적, 자취들이 어렴풋이 형상을 보여주다가 사라지고 드러내다가 감춘다. 이 희미함은 사물의 외곽선을 다보여주지 않아서 대상을 그리면서도 열어놓는 자유로움의 세계를 허용한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은 사물의 외곽선을 다소 흐리게 하고 대상의 형상을 분명치 않게 하는 모호한 서정의 시적 기능을 갖는다. 그로인해 대상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의미를 열어놓고 개인의 감수성을 만들어내는 자유로움이 숨 쉰다. 이처럼 그의 사진구성은, 구도감각은 시적 감수성에 봉사한다. 이 사진은 미묘한 흑색과 회색의 단색조로 전개된 납작한 평면이다. 이미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것은 분명 자연의 구체적인 상을 안기면서도 미묘한 흑백의 덩어리고 입자로 부서지는 빛의 가루이자 가득한 습기로 홍건하기도 하다. 화면 안쪽으로 점차 엷어지고 사라지는, 희박해져가는 산 능선들, 구름으로 인해 텅 비어 버린 중심부와 그 위로 이어지는 산세, 그리고 실제 산과 물위에 비치는 산 그림자 등이 한 화면에서 한 쌍으로 존재한다. 문득 실제와 허상의 위계가 사라진다. 아니 그 모두가 공존하는 풍경이다.
조상민의 풍경사진은 고요함, 잔잔함, 안개와 구름 효과로 인해 동양 산수화의 여운을 느끼게 한다. 특히 모든 색을 포용하고 있는 먹색 같기도 하고 또는 언어로 형용화하기 어려운 색채의 번짐과 깊고 아득하고 서늘한 분위기로 인해 더욱 그렇다. 작가는 카메라의 눈이 보지 못하는 형태, 보이지 않는 색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 같다. 아니 자연스레 그런 실루엣, 색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망막에 의해 포착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보고 접한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생득적으로 체득된 마음과 시선이 프레이밍 한 이 풍경 사진은 결국 한국적인 정서로 짙게 문질러져 있다.
“바다와 숲의 풍경에 있어서 불필요한 형태나 디테일을 생략하고, 사물의 덩어리와 톤의 변화에 의한‘풍경과 실루엣’을 통해 자연을 표현하려 하였다. 흑과 백의 콘트라스트와 아웃라인으로 표현된 풍경은 때로는 명확한 형태와 톤으로 보이거나 때로는 어두운 실루엣이나 옅은 톤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것_들에 의해서 확실해지는 것_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노트)
F.WONDAERI_10_109x109cm/55.5x61.5cm_Archival Pigment Print / Gelatin Silver Print_2012
풍경은 이내 사라질 듯 하기도 하고 서서히 살아 오르는 것도 같다. 산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어 부풀어 오른다. 숨 쉬는 대기와 차오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기운들이 산을 감싸고 돌아다닌다. 산 사진은 얼핏 동양화로 재현한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을 안긴다. 그것은 카메라로 ‘그린’ 산수화다. 끝없이 이어지고 야트막하게 연결된 한국의 전형적인 산세를 보는 것만 같다. 대부분 안개나 구름에 의해 가려지고 지워진 산의 일부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로인해 산의 윤곽은 내부를 지운 채 강한 실루엣으로 차오르고 정작 산의 안쪽은 입김 같은 안개들이 지우고 있다.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여백은, 운무나 안개 자욱한 풍경은 일부분만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다. 나머지는 상상하게 한다. 온전히 보여지기 보다는 일부는 가려지고 나머지는 여백, 텅 빈 화면 안에 잠겨있다. 보는 이들은 온전하게, 전일적인 시선으로 그림을 바라볼 수 없다. 많은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적게 보여주고 다 보여주기 보다는 일부분만 보여주는 편이다. 보여주는 것보다 상상하게 하는 것이 그 대상을 좀 더 잘 보게 하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꿈꾸게 하고 기억하게 하고 회상과 여운 속에서 사물과 대상을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망막으로 모든 것을 보고자 하는 시(視)욕망을 짐짓 누그려 트리고 망막 이외에 몸이 지닌 다양한 감각기관과 정신적 활력을 통해 상상하고 지각하게 한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산수화였다. 그림을 보는 관자(觀者)의 상상작용이 일어나고 비로소 그림은 머리속에서 완성된다. 산수화를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그의 상상력과 지각작용을 독려하는 것이 산수화라면 이 사진 또한 그런 상상하기, 이른바 마음으로 보기를 적극 독려하는 사진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눈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심안으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 바로 산수화였다.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눈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양 가시적 공간을 구성한다.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그러나 동양화에서는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 혼융상태에 있다. 자연의 형태란 다만 고정된,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특질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 동양인들이 깨달은 공간, 세계였다. 서구인들의 경우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원근법에 의해 프레임 안으로 걸려들거나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사각형 속에 갇힌 이미지일 뿐이다.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 부터(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주체로서의)실체 또한 사상되는 것이다. 반면 동양인들은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그림은 '자연의 신적인 변화를 꿰뚫고 그 오묘함을 헤아려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인 셈이다. 이처럼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산수화는 구체적 사물과의 관계에 존재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그것은 기가 감도는 분위기 속에 여러 자연의 사물들을 종속시킴으로서, 자연의 숭고미를 강조함으로서 어떤 종교적인 황홀경(초월성)을 만들어 내려는 의도이다. 오랜 예비적 경험과 명상을 통해 풍경의 숨결(기)과 율동(운)과 상호조응(相)으로 마음이 가득하게 될 때 화가는 통일된 질서를 만들면서 그것을 표현한다. 이때 붓의 동작은 자연의 율동에 대응하고, 그려지는 그림은 우주에 울려 퍼지는 화음들을 쫓는 것이 된다. 그러니 산수화는 시각적 인상을 객관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작가의 심리작용에 개입함에 따라 말하자면 안으로부터 풍경을 창조해 내는 것이고, 이는 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고착시키고,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다. 조상민의 사진은 그러한 산수화의 전략과 매우 유사하다. 그는 고정된 형이나 윤곽선을 지우고 그것을 색채더미로, 실루엣으로 포착한다. 구체성과 세세한 정보가 사라진 대상은 한 순간의 변화 속에서 문득 멈춰 서서 호흡하고 있다. 저 자연의 오묘한 변화를 흑백 사진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는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을 심안으로 보고자 한다. 망막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았을 때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기운들이 불현듯 사진의 표면위로 가루처럼 부서진다. 그 가루가 모여 실루엣을 만들고 실루엣이 겹치고 흔들리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저 자연의 몸을 추억한다. 그 모습이 홀연 황홀하고 신비스럽다. 실제인지 허상인지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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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상민 | Jo, Sang Min
1966 서울 출생 | 1996 니혼(日本)대학교 예술학부 사진학과 졸업(B.F.A) | 2002 니혼(日本)대학교 예술학부 대학원 영상예술학전공 졸업(M.F.A) | 2004 니혼(日本)대학교 예술학부 대학원 예술학전공 졸업 (Ph.D) |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사진과 초빙교수 개인전 | 2002 <Seoul Byulgok> 가디언가든 갤러리 (일본 도쿄 긴자) | 2005 <Time Texture> 갤러리 가이아 (한국 서울 인사동) 작품소장 | 2002 리쿠르트 홀딩스 (일본 동경)
1966 Born in Seoul | 1996 B.F.A, Nihon University, Department of Photography | 2002 M.F.A, Nihon University, Department of Image Art | 2004 Ph. D, Nihon University, Department of Art | Present-Visiting Professor(Department of Photography, Seoul Institute of the Arts) Exhibition(solo) | 2002 "Seoul Byulgok" Guardian Garden Gallery (Tokyo, Japan) | 2005 "Time Texture“ Gallery Gaia (Seoul, Korea) Public Collection | 2002 RECRUIT HOLDINGS (Tokyo/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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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311107-조상민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