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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교류전
강홍구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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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아트센터
2013. 5. 22(수) ▶ 2013. 6. 29(토)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사북로 164 대우타워 B1 | T. 043-222-0357 관람시간 | AM 10:00 ~ PM 7:00, 매주 일요일 휴관 작가와의 대화 | 2013. 6. 6(목) PM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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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공간을 의미있는 장소로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
우민아트센터는 연중 1회, 다양한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공공성과 창의적 소통을 지향하는 교류전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2012년 금호미술관 소장품 교류전 <공명>에 이어, 2013년에는 강홍구 작가의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의 교류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고은사진미술관(부산 3.6-5.7)의 연례기획으로 준비된 전시가 중부권(우민아트센터, 청주, 5.22-6.29)과 수도권(원앤제이 갤러리, 서울, 7.4-7.24)를 순회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중부권에서 우민아트센터가 기획 진행합니다.
작가는 디지털 사진을 매체로, 생산주의적 공간 개발에 대한 성찰적 기록을 긴 풍경화 형식으로 작업하고 있으며,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 에서는 부산의 오래된 동네(산복도로의 집들)를 외부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업을 소개합니다. 그 장소에 사는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하고 친근한 거주의 장소이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풍경에서 관람객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진 장소로 다가 올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 일수도 공동의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며, 정서적 추억일수도 사회적 지각 일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공간에 대해 의미있는 장소로 다시 인식할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경험과 조우하길 바랍니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에드워그 렐프 『 장소와 장소상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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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노트
부산은 내게 아직도 유령 같은 도시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부산에서 한 십 년 쯤 살면서 돌아보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한 개인이 부산이나 서울 같은 공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지적 기억은 시간차가 있다. 늘 다니던 길이나 동네는 현재형 기억을, 드물게 가는 동네는 과거의 기억을, 아주 가보지 않은 곳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돌아보지 않은 부산은 내 인지 지도 밖에 있다. 고은 사진 미술관의 제안으로 부산의 산동네를 찍기 시작한 것이 2011년 6월 무렵이었다. 그 후 약 일 년 반 동안 부산을 둘러보고 사진 찍었다. 일박 이일, 이박 삼일의 일정으로 십칠팔회 쯤. 그러니 부산에 관해 뭘 안다고 말할 처지가 못 된다. 기껏해야 내가 사진 찍은 동네들- 감천동, 물만골, 우암동, 서동, 영선동, 신선동, 매축지, 문현동, 초량동, 수정동, 안창마을, 아미동 등에 대해 약간 알뿐이다. 그것도 집과 가게와 공중 화장실과 식당과 골목길 에 대해서 아주 조금.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 어느 동네가 어디에 있는지 조금 알았다고나 할까. 왜냐면 부산에는 산동네가 너무 많고 다양해서 그 모든 것을 돌아볼 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산동네가 아닌 매축지 같은 마을까지 합하면 그런 동네들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처음 부산 산동네 사진을 찍으려고 갔을 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집과 마을의 다양성과 비좁은 공간을 탁월하게 이용하는 효율성이었다. 예를 들면 어떻게든 주거면적을 넓히기 위해 일층 보다 이층을 조금 더 넓게 지은 "한 뼘 이층"이라고 부르는 집들이 그런 예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산동네를 구성하고 있는 집들을 생존의 건축, 집짓기의 밑바닥, 건축가 없는 건축, 원초적 건축 따위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토속적 건축을 의미하는 버네큘러 건축 vernacular architecture 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산동네의 집과 건물, 계단, 길, 옥상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경관을 표현하는 데는 턱도 없이 모자란다. 아니 애초부터 말로 이를 수 없는 곳에 그 집과 마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는 건축가들이 지은 건물들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좀 있다. 아니 거부감이라기보다는 심리적 거리감이나 정서적인 불편함이라고 해야 할까. 유명한 건물들, 현대식 건물들을 머리로는 이해를 하겠지만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것은 건물들이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들과 비슷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그럴듯하게 지으려 한 건물들일수록 그런 기분은 심해진다. 예를 들면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 들어선 건물은 짜증이 난다. 자의식이 너무 강하게 들어가서 모든 것을 다 무시하겠다는 오만한 태도가 곳곳에 붙어 있어 보여서이다. 공격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방어적이다. 내 작품을 몰라주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이 너무 싫다. 건물 전체에 자신감이 없다. 산동네의 집들은 그런 자의식이 없다. 계단과 난간과 지붕과, 옥상과 이층 모두 다 솔직하다. 물론 살기는 불편할 것이다. 좁고, 통풍도 잘 안되고 화장실도 없는 집이 많으며, 사생활의 비밀 보장도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에 거기에는 일종의 자신감과 사람이 꼭 필요해서 지었다는 느낌이 있다. 절실함이 건물, 길, 골목, 계단 곳곳에 스며있다. 그렇다고 그 절실함이 공격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그것은 주거지를 마련하는 게 우선이었던 집과 마을에 축적된 시간과 역사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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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하는데 참고 할만한 뭔가를 찾아 책과 인터넷을 뒤지다가 전시 제목으로 쓸 수 있을 만한 단어를 발견한다. '프로세믹스 Proxemics' 들어본 말이지만 잘 알지는 못했던 용어이다. 인터넷을 뒤져서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이 만들어낸 조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에드워드 홀의 책 『숨겨진 차원』을 읽는다. 내용은 이미 이런저런 통로로 일반화 되어 있기 때문에 익숙하다. 우리말로 적절한 번역어가 없어서 '공간 사용법?' 정도로나 겨우 바꿀 수 있는 프로세믹스의 개념은 폭이 아주 넓다. 사람과 사람이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에서부터 인간이 어떻게 공간을 생산, 조직하고 소비하는지를 거쳐, 문화에 따라 다른 공간에 대한 인식과 사용 방식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단순히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을 넘어 공간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행동이 어떻게 문화화 되고 개인화 되어 실천되는 지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이런 마을과 집들을 사진 찍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어느 정도 거리에서 어떻게, 무엇을 찍을까를 결정하는 일이다. 내가 찍으려는 장소들은 잘 알려진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찍었기 때문에 더 힘들었다. 처음 몇 번은 스케치 하듯이 돌아보고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내린 처방은 집과 길들을 찍자는 것이었다. 집을 찍는 다는 것은 마을을 이루는 집들이 가지는 건축적 원초성, 혹은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겹치고 줄지어선 집들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물론 지붕과 벽 색, 물통의 파란색 따위는 유사하지만 대지의 입지 조건과 크기, 경제 사정, 필요성에 따라 너무나 다양하다. 그 다양한 집들은 문자 그대로 유기적으로 생장하고 변모해왔다. 움막과 루핑집에서 판자집, 그리고 벽돌집을 거쳐 이층과 삼층으로 진화했다. 그래서 한 채의 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집들의 과거가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 집들을 사진으로 담는 일은 어렵다. 문현동 돌산마을과, 물만골 정도를 제외하고는 집 사이가 너무 가깝고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도무지 촬영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채, 두 채가 아니라 몇 채의 집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도록 찍는 수밖에 없었다. 길과 계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골목과 계단이 대부분이었고 일종의 미로를 이루고 있는 곳도 있었다. 때문에 내가 찍은 사진들은 그것을 재현 한 다기 보다는 짐작할 수 있도록 암시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집들이 모여 있는 스펙터클한 풍경이 아니라 개별적인 집의 생김새, 건축 방식과 재료의 사용, 집에 스민 공간 형성의 의지를 찍으려 들자 사진의 방향이 정해졌다. 사진을 잘 찍거나 멋진 사진이 되는 것을 배제하고 일종의 풍경 아닌 풍경이 되도록 시도하기로 했다. 풍경 아닌 풍경이란 기록적인 측면과 집과 길들이 가지는 개별적인 존재감이 섞여 다큐와 개인적인 시선 사이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원칙 비슷한 것이 일관 되게 적용 되지는 못했다. 영도를 찍은 사진들에서는 집들 사이로 보이는 바다가, 안창마을이나 물만골에서는 산과 숲이 풍경을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구지 배제할 이유도 없었다. 바다와 산이 보이는 것이 필연적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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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르페브르의 말대로 공간, 장소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것들에 의해 생산되고 역사를 재현한다. 부산의 산동네들은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 육이오 전쟁 피난민들로부터 시작된 역사가 이룬 구성물이다. 이 구성물에 대해 사람들은 문화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관광 상품화 하려 한다. 그것은 산동네 사람들의 삶과 집과 공간을 문화 상품, 즉 산동네의 본질과는 별 관계없는 구경거리로 전환시킴을 뜻한다. 나쁘게 말하면 그럼으로써 역사를 은폐하고, 장소와 공간이 가진 구체성과 가혹한 삶의 흔적과 기억을 지우는 행위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런 일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은 별 현실적 힘이 없는 예술이 도시재생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퇴락해가는 산동네에 대한 도시 재생사업의 선택의 여지는 많지 않다. 내가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마을을 보존하고 살아 있도록 하는 것, 마을을 구경거리가 아니라 살만한 동네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그런 노력들은 마을을 둘러 볼 때마다 눈에 띄지만, 점점 늘어가는 빈집들을 보면 미래가 그렇게 밝아 보이지는 않는다.
사진은 거의 다 찍었다. 작품도 얼추 만들었다. 그런데도 뭔가 부족하다는 기분이 자꾸 든다.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내 사진으로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현장감, 아우라 같은 것일까? 아니 그것 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다. 집과 마을이 담고 있는 시간과 역사의 두께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 모든 것을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어떤 것인가? 사진과 피사체 사이의 건널 수 없는 무엇 때문인가? 현실을 사진이 재현 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늘 그렇다. 그리고 아마도 이 불만과 결핍감이 모든 작가들에게는 근원적인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사진을 찍고 작업을 하게 하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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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홍구
강홍구는 1956년생으로 목포교육대학과 홍익대학교 및 동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고은사진미술관(2013), 원앤제이 갤러리(2012), 몽인아트센터(2009), 리움미술관 로댕갤러리(2006)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히든트랙(서울시립미술관, 2012), (불)가능한 풍경 (플라토, 2012), 메타데이터 (우민아트센터, 2012), 부산, 광주 비엔날레와 독일 ‘Hannover Messe 2009'<Made in Korea - Magic Moment : Korea Express>등 국내외 다수 단체전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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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30522-강흥구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