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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展
Milk
milk bath_oil on canvas_162.2x130.3cm_2013
153 갤러리 153 GALLERY
2013. 5. 15(수) ▶ 2013. 6. 2(일) Opening 2013. 5. 15(수) pm 5. 서울시 서초구 서초중앙로 251 운창빌딩 B1 | T.02-599-0960
milk baptism_oil on canvas_145.5x112.1cm_2013
우유_ 상징적 가능성
이번 전시는 그림을 통한 일종의 관객과의 소통에 대한 실험이다. 그 핵심 아이디어는 상징들이 화면 안에 주어진 특별한 상황 속에서 서로 충돌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면 상징들은 관객에게 어떤 선택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택된 상징은 관객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과 어우러져 중요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게 한다. 이렇게 누구든 내 그림을 보고 의미 있는 자기만의 얘기를 갖게 하는 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일단의 목적이다. 더욱 재미있는 점은 완성 후에 작품을 보면서 나도 내 그림에서 전에 몰랐던 나만의 이야기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man with milk flower vase_oil on canvas_162.2x130.3cm_2013
우유… 왜 우유인가?
몇 가지 선명한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우유와 관련된 한가지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내가 아직 학교에 다니기 전, 집에 매일 우유배달을 받았었다. 그런데 몇 일째 우유가 배달되지 않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중, 하루는 옆집 세 살짜리 꼬마가 우리 집 앞에서 우유를 집어 들고 뒤뚱뒤뚱 달아나는 것을 드디어 포착했다. 그걸 보던 나는 '야. 거기서!'라고 소리쳤고 어머니는 '너무 귀엽다.'하시며 웃으셨다. 난 괘씸한 그 꼬마를 보며 웃으시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우유가 그렇게 아깝지 않으셨나보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내게 우유는 환산 가능한 가치였던 반면, 어머니에게 우유는 아이에게 주어져야 마땅한 모성으로서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아니, 반대로 어쩌면 내게 우유는 생존을 의미하는 상징이고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아이다움에 비해 문제 삼을 만큼은 아닌 작은 가치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그 일을 회고하면서 드는 생각은 우유는 가치를 지닌 물건과 상징 사이 어딘가에 그 의미의 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충돌되는 우유의 상징성은 그래서 무수히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유를 건조하게 사실적으로만 그려도 그 안엔 상징성이 있고, 추상적으로 그려도 이미 그 안엔 맥락이 동반된다.
태고 때부터 인류와 함께 살아온 역사를 지닌 물건이나 재료 등은 늘 회화의 소재로 매력적이다. 예를 들자면, 인체 그 자체와 그 부산물들이 그렇고, 무기가 그렇고, 반려동물들이 그렇고, 음식이 그렇고, 꽃이나 나무 등의 식물이 그렇다. 우유도 그런 맥락에서 인간과 삶에 관해 말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매개체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시 정리해 보면, 내가 우유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우유가 가지고 있는 서로 상충되는 의미의 상징들이 매우 많은 삶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유가 갖고 있는 그 상징들은 다음과 같다. 모성, sexuality, 치유, 순결함, 대량생산, 부유함, 가난함, 잉여, 자비, 오염, 상품성, 자연물, 제의적 의미, 흔함, 추상성, 구상성, 역사성, 현재성, 즉물성, 유기물, 유동체, 폭력성. 그 밖에도 우유는 보편적 시각에서 끊임없이 많은 해석이 가능한 매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징들이 서로 모순되는 상황을 만나면 그리는 작가 개인과 감상자에게 어떤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는데 그 선택이 작품을 의미 있는 철학적 기회가 되는 사색의 장이 되게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초현실적 자동기술을 넘어선 어떤 마술적 현실의 장치가 된다고까지 주장하고 싶다.
milk rain_oil on canvas_145.5x112.1cm_2013
우유의 추상적 가능성_ 흰색의 축제
색채의 측면에서 우유가 지닌 매력을 얘기하자면 내 개인적인 물감사용에 대해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난 흰색을 쓰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흰색물감이 캔버스에 발라져서 그것이 빛을 대변하고, 신성함을 은유 할 때, 그보다 더 숭고한 시각예술적 쾌감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만족감이 있다. 어떤 그림을 그리든 흰색의 역할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검토하게 되는 버릇이 내겐 있다. 흰색의 역할이 숭고함으로 연결된다고 믿는 작가의 개인적인 주관이 반영된 것이다. 우유의 경우 이러한 흰색의 사용 측면에서 보자면 거의 축제에 가깝다. 얼마든지 흰색을 고민하고 흰색에 헌신할 수 있다. 그래서 흰 우유가 그렇게도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온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자체로는 흰색뿐인 우유를 그리기 위해 사실은 수 없이 많은 다른 color를 쓰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순수한 white를 쓸 기회는 매우 드물다. 흰색은 수없이 많은 외부적 요인에 쉽게 영향 받기 때문일 것이다.
milk abstract5_oil on canvas_72.7x60.6cm_2013
우유는 병과 컵에 담긴다.
난 대학 시절 한 교수님이 내게 개인적으로 하셨던 ‘부재를 통한 존재의 드러남’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가끔 떠올린다.
‘부처와 그 깨달음의 공간이 되었던 보리수 나무를 생각해보라. 보리수나무 앞에 부처가 있을 때보다 보리수 나무만 있을 때 보는 이에게 부처의 존재는 더욱 확실해진다. 네가 믿는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빈 무덤을 생각해봐라. 그 비어있는 무덤의 역할은 더 이상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이 아니다. 그 낯설어진 공간은 오히려 죽음보다 삶을 더욱 강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 사물을 사물로 그리면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 사물을 부정하게 된다. 그러나 화면상에서 그 사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비로소 감상자는 그 사물의 역사적 맥락과 상징성에 강한 끄덕임을 보내는 것이다. 비어있는 우유병을 그리면서 나는 생각한다.
‘어떤 사물도 깨끗하게 씻어서 알맞은 조명을 주면 어떤 의미를 발휘한다. 그 사물이 제 기능을 하고 있지 않다면 자기 의미를 낯설게 하며 의미는 더욱 확장된다.’ 라고 .
빈 우유병이 우유의 상징성을 무한히 확장하는 빈 무덤이 되어주듯, 이 전시가 관객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빈 그릇이 되기를 바라며 전시를 준비해 보았다.
half full oil on canvas_72.7x60.6cm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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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30515-이성수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