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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옥 展
회화적 결합을 넘어서는 결합의 회화
뉴욕-갠지스강_145.5x112cm_acrylic on canvas
금호미술관 1F
2013. 3. 21(목) ▶ 2013. 3. 3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간동 78번지 | T.02-720-6474
로마-푸켓
회화적 결합을 넘어서는 결합의 회화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회화, 복원된 역사의식의 장(場)
김미옥은 실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린다. 실재하지 않은 풍경을 실재처럼 보이도록 그린다. 하지만 그 풍경들이 실재와 전적으로 무관한 것은 아니다. 김미옥의 풍경은 오히려 분명히 실재하는 구체적인 장소들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결과는 단연코 비실재하는 풍경이다. 실재와 비실재를 오가는 변증적 풍경화랄까. 작가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장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이 변증적 풍경을 ‘발생시킨다.’ 실재하는 복수(複數)의 장소들을 회화적으로 정교하게 결합함으로써, 비실재적 광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는 이들은 장소들의 눈에 익은 특성들에 가려진 비실재성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조치된 ‘화학적 정교함’의 덫에 걸려들기 때문이다. 선험과 경험 사이의 틈새에서 일종의 시각적 교란이 야기되는 것인데, 이로 인해 그들은 가보진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곳으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이 ‘속임’과 ‘속음’은 ‘거짓’이나 ‘기만’과는 명백하게 구분된다. 타자를 희생자로 만드는, 또는 만들고자 하는 거짓이나 기만과는 달리, 여기서의 속임은 보는 이들을 어떤 절박한 역사 해석으로 인도하기 위해 고안된 미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사람들을 훨씬 덜 속이며 진실로 인도하는 해석으로 말이다. 내 생각엔 김미옥이 가담한 측의 해석이 자신의 순결을 위해 역사의 오류로부터 스스로 단절되기를 선택했다는 측의 그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감상자들은 실재와 비실재의 변증이 허용하는 시각적 유희에 잠시 머문 뒤에, 곧바로 그 차원을 훨씬 능가하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도록 초대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바티칸-갠지스강
일련의 존재적 분리들, 곧 격리와 단절, 배제와 추방, 분열과 이별은 인간에게 깊은 고통을 안긴다. 이산, 디아스포라, 굴락, 정치범수용소… 역사는 인류의 범죄들이 거의 분리와 분열에 의해 촉구되었으며, 더 한 분리와 분열로 결론지어져 왔음을 명백하게 보고한다. 카인의 도시는 자기보호가 어떻게 자기격리를 의미하게 되었는가를 일깨워준다. 히틀러와 나찌의 광란은 아리안을 그들이 열등함으로 간주한 타자와 구분하려는 시도로부터 발단되었다.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이 만든 코소보 사태, 그리고 이념의 마지막 대치지역인 분단된 남, 북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맥락이다. 장소는 분리, 분열, 분단, 격리의 시간들을 기억한다. 인종청소, 민간인 학살, 고문, 성폭력의 역력한 흔적들이 장소들에 각인된다. 기록이 담아내지 못하는 절규, 탄식, 통곡, 회한이도 예외가 아니다. 아유슈비츠, 코소보, 로마 원형경기장, 파리의 개선문, 38선…, “모든 장소는 인간처럼 자신의 결핍을 지니고 있다”고 김미옥이 단언하는 맥락이다. 김미옥은 그 장소들에서 “시대적 부조리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의 횡포, 그리고 많은 억울한 희생”의 기억들과 마주한다. 그곳들에서 작가는 이 거만한 자본의 시대가 제 입맛에 맞게 명명한 관광지나 유적지 너머의 것들을 보고 듣는다. 관광은 역사의 무게를 분쇄하고 파기하는 해체적 인식을 주도할 뿐이다. 미제나 일제 카메라를 앞세워 기억을 스펙터클 화하고, 비극마저 소비재화할 뿐이다. 렌즈가 소개하는 세상은 관광객들의 인식을 건조한 스폰지처럼 푸석푸석한 것으로 만든다. 기억은 최악의 비역사나 탈역사를 구성해낸다. 역사는 여행과 입장권을 위해 지불한 돈 만큼 보상해야 한다. 모든 경험은 기분전환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이 과정에서 ‘역사의 학습’은 ‘학습된 역사’로, 시인의 영감은 관광지화되고 자본식민지화된 오락적 감상으로 뒤바뀐다. 세상이 오늘날처럼 끔찍한 방식으로 돌아가는데 일조하는, 그 오락적 감수성으로 말이다. 입장권에 부응하면 그만인 역사만큼 극단적으로 타락한 역사를 가졌던 시대는 이전에는 결코 없었다. 역사는 그것을 똑바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인식 안에서 복원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복원됨으로써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무언가를 들려주고, 외치고, 묻고, 요구한다. 감각의 유희, 지각의 욕망을 넘어서는, 시간의 전율, 산화된 뼈와 살들의 호소를 들려준다. 관광지화한 역사를 복원하고, 장소들의 장소성이 회복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는 것이 관광지화 된 장소들의 한 가운데서, 그럼에도 다시 시간의 결을 다잡고, 기억의 끈을 놓지 않아야만 하는 이유다. 동시에 김미옥이 역사적 장소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회화의 출발점으로 삼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스펙터클 화된 풍경의 이면에서 해체되고 산화된 역사의 이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분리와 분열이 남겨온 통증을 감지한다.
“나는 그러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안된 풍경을 결함시키고, 화해시키는 과정에서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을 화해시키고 조화를 꿈꾼다.”
김미옥은 갠지즈와 카파토피아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음으로써, 그리고 타지마할의 잔영을 바티칸으로 대체함으로써 뿌리 깊은 분열과 대립의 역사를 전향적으로 읽어낸다. 이 세계에서 갠지즈와 카파토피아, 힌두교와 크리스트교, 강의 문명과 사막문명은 더 이상 서로를 배타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 절정은 바티칸의 중정에까지 갠지즈의 강물을 흘려보내는 장면이다. 비록 기호적 차원이요 회화적 수단일지라도, 문명들 간의 포용과 화해가 탁월하게 실현된다. 김미옥의 회화는 문명들 간의 예민한 대립각을 완화하고, 격앙된 적대감을 부드럽게 아우르는 데 봉헌된다. 갠지즈와 스핑크스, 카파토피아와 앙코르와트, 토파즈궁과 창덕궁의 결합은 물리적 공존을 뛰어넘어 화학적 뒤섞임에 까지 이른다. 결합의 미학은 분리와 분열의 맥락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 심도를 더해 간다. 그 방향성과 목적은 ‘picturesque’의 급수를 올리는 것, 즉 보다 풍경이 될 만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2차원 회화의 제한을 위반하고, 탈서사의 신조를 전복시키며, 단번에 모더니즘과 칸트미학에 대한 급진적인 도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스핑크스_162.2x130.3)cm
모던(Modern)적 분리, 포스트모던적(Post modern)적 분열과 결별하기
모던 아트는 세상에서 분리된 예술을 선언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 형식을 위한 형식, 언어를 위한 언어를 순수하고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했다. 지난 한 세기를 주관해 온 그것의 패러다임은 분리하고, 떼어내고, 격리하고, 소외시키는 것이다. 격리의 대상에서 시간의 서사인 역사와 그 축적인 전통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토양 위에서 미래주의는 오래된 것들을 격리시켰고, 초현실주의는 현실의 고통을 인식의 지평에서 추방했다. 추상주의는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적개심을 선동하면서, 어리석게도 형상 자체에 내재하는 사유적 기반을 간과했다. 개념미술은 스스로 사물의 사유적 기반을 모독하거나 폄훼함으로써, 스스로 사변의 수용소에 유폐되었다. 표현주의와 신표현주의는 감정과 감정의 정화 사이의 균형에 거의 극적으로 무지했다. 전례가 없는 후안무치요 철부지인 팝아트는 깊이와 진중함이라는 지혜의 유산을 뒤엎어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모던 아트가 시대와 격리를 통해 순수라는 가치를 담보해왔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와 격리됨으로써, 오히려 분리와 분열을 일삼았던 근대기를 고스란히 재현했을 뿐이다. 모던 아트야말로 문명의 병리와 역사의 오류를 재현하는 가장 극적인 방식인 것이다. 분리와 분열은 모던 아트의 미학을 넘어 근대 지성사 전반의 문제였다. 자연과학은 오히려 자연을 수탈하고 소외시키는데 활용되었고, 정치학은 시민들을 억압하는 정치를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었다. 법체계는 정의로부터 유리되었고 경제는 윤리로부터, 시장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격리된 것들 사이에는 적개심과 증오가 싹텄고, 갈등과 소외가 증폭되었다. 최근 유행하는 융복합지식은 그 이름과는 달리 인간소외와 문명의 병리를 오히려 더 악화시킨다. 반면, 김미옥의 결합된 풍경은 분리와 분열에 기초하는 모던회화의 패러다임에 역행한다. 이 세계에서는 분리가 아니라 결합이 핵심가치요 충추적 미학이다. 결합은 예술정신이자 방법론이며, 화해의 미학이자 치유의 처방이다. 여기서 이미지들이 호명되고 사용되는 방식은 모던 아트의 병적인 순수담론의 그것과 선명하게 차별된다. 동시에 ‘모더니즘의 극복’을 알리바이로 내세웠던 포스트모던 아트의 숱한 시도들이 거의 예외없이 견유주의와 임의성의 블랙홀에 빠져들었던 것과도 구분된다. 김미옥의 회화는 예컨대 데리다적 차연이나 들뢰즈적 리좀 구조, 또는 탈영토화 등의 노선과는 최소한의 연관성도 없다. 이미지들의 이종교배이긴 하더라도, 그것들의 결합을 통제하는 질서는 구체적이고 뚜렷한 역사의식에서 비롯되는 게통적 서사구조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회화가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재현의 부정, 세계와의 격리, 서사로부터의 탈피였다. 하지만 김미옥의 회화에서 이미지들은 오로지 역사적 인식을 갱신하고, 서사적 맥락을 복원함으로써 현 문명에 범람하는 분리주의를 넘어선다. 동시에 이미지의 포스트모던적 절합이 문명의 오류와 역사인식의 해체를 오히려 방조해왔던 것과는 달리, 김미옥의 결합된 풍경은 주체적인 역사해석과 치유의 길을 밝힌다.
타지마할-바티칸
감각의 유희, 감정적 옹알이, 오락적 실용주의를 넘어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김미옥의 회화가 ‘다시 문명사적 차원으로 복귀하는 예술’을 예감하게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특히 거실과 주방의 신변잡기에 머물 것을 촉구했던, 각개화된 자기고양의 예술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사적 감각의 유희나 감정적인 옹알이, 또는 오락적 실용주의를 넘어서는, 역사와 문명의 단층을 꿰뚫으려는 비전(vision)이 진작 결행되었어야만 했다. 삶의 무의미나 노래하면서 육신의 저열한 욕구를 쫓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 인생의 경험에 심오하게 부합하는 예술론이 시도되었어야 했다. 이런 맥락에서 한 가지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변기에서 출발하고, 통조림을 경유하며 다이아몬드와 포르노그래피에 도달하는 예술이 그 출처가 될 수는 없을 거라는 게 그것이다.
피라미드-갠지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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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30321-김미옥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