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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석 조각 展
뿌리 깊은 나무Deep rooted trees_500x180x660mm_대리석marble_2012
갤러리 라메르
2012. 11. 14(수) ▶ 2012. 11. 20(화)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갤러리 라메르 3층 | T. 02-730-5454
생명의 메아리Echose of life_640x200x640mm_대리석marble_2012
제5회 개인전을 준비하며....... 여러차례 개인전을 준비했던 기억들을 돌이켜보며 이제야 조각에 대해 조금씩 깨우침을 느낀다. 매일 감사한 마음으로 작품들과 오늘도 작업장에서 논다.
생명의 선율Melody of life_480x170x63mm_대리석marble_2012
자연에 침투(浸透)하는 아름다움-노재석의 작품에 대하여
자연에서 구한 돌 한 덩어리가 아름다운가, 아니면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만져 어떤 의도를 반영하고 변형시킨 돌덩어리가 아름다운가? 이 물음은 플로티누스가 제기했던 아주 오래 된 미의 문제, 즉 미에 대한 학문적 궁구의 한 형식이다. 이런 물음을 통해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이렇게 물으면서 어떤 대답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어떤 응답이 더 타당하고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예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예술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후자의 답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가끔 전자에 대해 궁구(窮究)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다. 그것은 무위(無爲)다. 따라서 무위가 아름다움의 한 양식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미의 이해이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이 물음을 던진다면, 어떤 예술가가 무위를 선택하면서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까?
생명의 숨결Breath of life_500x150x470mm_대리석marble_2012
노재석의 작품은 이 형언모순(形言矛盾) 안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는 모순의 경계에서 고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순으로부터 그의 작업은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가 돌덩어리 하나를 마주하면서 먼저 이 모순된 경계로부터 자연과 자연으로부터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온 몸으로 이끌어내면서 돌 안으로 침투한다. 그것이 그의 작업방식이다. 이런 작업은 조작(操作)이라는 결과를 만든다. 자연-돌덩어리와 그것에 침투하는 작가의 표현이 어떤 구체적 형상을 목적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기억과 경험들이 지배하는 방식으로 무엇을 향해 만들어간다는 의미에서 그의 작업방식은 확실히 제작(製作: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일치하는 기물이나 사용목적의 무엇을 만들어내는 행위)이 아니라 조작(操作인 것이다. 그래서 노재석은 操作을 통해 造作의 결과를 가진다.
생명의 숲1The life of the forset_300x150x940mm_대리석marble_2012
그가 자연물을 대하는 태도는 작업방법이다. 작업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드로잉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대게 석조작업은 하나의 덩어리를 찾아내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덩어리를 분리시키는 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노재석이 찾아내고 사용하는 방법은 사라지는 드로잉과 남겨지는 드로잉의 흔적으로 종합되어 있다. 그의 작업을 그래서 전통적인 양감, 즉 덩어리(mass;매스)를 통해 조각을 이해하는 방향에서 온전하게 읽혀지거나 감상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자연을 몸으로 먼저 끌어낸다. 그 몸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움직여야 그 기억들을 밖으로 드러낼지를 통제하고 있다. 그리고 이 통제의 방식, 그러니까 몸의 기억으로부터 그는 마주하는 작업의 대상에 통제된 자연-기억된 자연과 경험 속의 자연을 안으로 밀어 넣어간다. 이 과정에서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드로잉기법이다. 이 방식이 가져온 유효함으로 인해 그의 작품에는 선묘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을 이어주며 동시에 공간과 허공을 분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의 석조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선의 이동 경로는 형태를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스를 거부하면서 경계를 통해 매스의 감(感)을 더 크게 만들어 낸다. 이런 작업방식은 매우 특이하고 개성이 넘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왜 매스-양감을 우선하는 전통적인 조각방법에서 빗겨 있을까? 그의 작품은 충분히 양감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업에서 번뜩거리는 것은 자연을 드로잉의 방식으로 접근해 가는 고집스러운 그의 태도라 하겠다. 그가 기억하는 자연은 자신의 신체 사이즈 안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움직임 안에서 기억의 소자들로 재구성된다. 그래서 그는 그 기억을 가장 정묘(精妙)하게 드러내기 위해 드로잉을 자연스럽게 선택한 것이라 하겠다. 아니, 그는 드로잉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누군가에 의해 이끌려지듯이 기울어져 있으며, 그 조작방식이 ‘자신의 자연’을 능하게 드러내는 쾌감으로 이어진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이 드로잉의 방법은 노재석이 만나고, 그의 몸에 각인되고 그의 기억으로부터 통제되는 자연과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생명의 숲2The life of the forset_290x170x650mm_대리석marble_2011
그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자연의 형상을 닮아 있다. 당연히 자연으로부터 경험된 자신의 기억-몸의 기억이 만들어내는 작업이기에 그러한 ‘형상의 유사성’을 작품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자연의 형상에 그렇게 닮아가는 ‘꼴-결과물’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감상자의 몫으로서 그의 작품을 자연의 형상과 일치시키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한다. 그의 작품을 자연의 형상과 일치시키는 하나의 관점으로서만 바라볼 때, 우리는 노재석이 보여주고자 하는 전체의 일면만을 보게 될 뿐이다. 그는 감상자들의 일람(一覽)의 쾌를 거부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래서 그는 작품이 언뜻 나무처럼 보인다든지, 어떤 형상으로 이미지가 중첩되는 것을 특별히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에서 형상적 이끌림은 이차적인, 그러니까 부수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연이 자신의 몸을 통해 지나간 흔적을 돌에 남긴다. 우리는 그것의 흔적으로부터 닮은꼴을 찾을 뿐이다. 마치 여름 뭉게구름을 팔베개하고 볼 때, 그 구름 안에서 친구랑 서로 무엇이 닮았는지, 닮은꼴을 추적해내곤 하던 그 일람의 쾌처럼 말이다. 하지만 작업의 본질은, 노재석이 본 자연은 굳이 무엇으로부터 기억이라기보다, 자연 그 자체로부터 체화된 자신의 경험과 기억인 것이다. 구체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이 ‘전체’에 대해 그는 자신의 느낌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이 보여주는 형상은 그래서 무엇을 닮았다기보다, 온전한 그의 기억이 몸에 의해 통제되는 그 자연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생명의 숲3The life of the forset_700x150x570mm_대리석marble_2012
노재석은 자신의 규칙 안에서 작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그 규칙은 일정한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러니 규칙이 있으되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그런 규칙은 작품 안에서 자유로움으로 남겨진다. 얽매이지 않지만 그가 규칙을 작업의 몸 안으로 가져오는 것은 질서로 존재하는 자연의 이치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질서마냥 있으되 얽지 않는 그 있음의 방대를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심적 시상(詩想)을 통해 통제하려는 몸에 대해서도 너그럽다. 그런 몸의 통제를 통해 노재석은 자신에게 왔다 가버린 자연과 교감을 농익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바람을 팔 벌려 안아버린 사람만이 가진 바람에 대한 기억과 같고, 풍랑 앞에서 그 처-얼-썩 거리는 파도를 맨얼굴로 맞아본 사람만이 가지는 바다의 기억과 같은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 자신의 일람이 주는 쾌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이 침투해 들어가는 그 바람과 파도-물론 바람과 파도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고유한 그만의 어떤 자연과 교감도 모두 다-에 대해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향해서 반복이라는 방식으로 헌신할 뿐이다. 그의 몸을 던지는 행위, 헌신이 만들어내는 작업은 바람소리를 불러오기도 하고, 나무의 짙은 그늘을 우리에게 드리우기도 한다.
생명의 싹sprout of life_380x200x670mm_대리석marble_2011
그의 작품은 환조의 아름다움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가 다룬 돌은, 방향을 바꾸어 만날 때마다 제 각기 다른 모습을 살며시 드러내 준다. 자연 속의 자연물들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그의 돌들은 자연의 돌처럼 그러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다시 돌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깎이고 다듬어졌음에도 다시 자연 속의 자연물처럼, 그 돌들처럼 노재석의 돌들이 “그러하듯이 있다”. 돌덩어리가 작품이 되고, 작품이 돌덩어리가 되는 그 경계에 그의 작품은 결코 ‘돌처럼’ 돌을 닮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인위(人爲)는 철저하게 통제된 인위적 아름다움에 기반 한다. 그 인위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에서 만난 작품은 ‘비로소 돌과 같이 있는 것’으로 조작(造作)되어 남아 있다.
이 섭(전시기획자)
생명의 향연life`a feast_540x120x470mm_대리석marble_2012
생명의 흐름The flow of life_730x240x740mm_대리석marble_2012
숲의 여정forest`s journey_370x100x750mm_대리석marble_2012
숲의 환희1The hliarlty of the forest_630x270x920mm_대리석marble_2011
숲의 환희2_The hliarlty of the forest_400x130x620mm_대리석marble_2011
아낌없이 주는 나무Bonnteous wood_500x180x650mm_대리석marble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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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재석
나는 꿈꾸는 조각세계를 위해서 목원대학교 미술교육과 조소로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조각전공으로 졸업하였다. 각종 공모전에서 대상과 특.입선을 하며 기초를 닦았으며, 그룹전. 초대전을 250여회 전시를 하면서 나의 세계는 한 계단씩 성숙되어짐을 느낀다. 나의 길은 미술학원,고등학교,대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가르치고 배웠으며, 현재는 초대작가,연구위원, 심사위원,심의의원,운영위원 그리고 여덟개의 협회 및 단체에서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mail | wooseok2210@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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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21114-노재석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