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환 展

 

 

variation_287x245cm_oil on canvas_2010

 

 

김종영미술관 신관

 

2012. 10. 26(금) ▶ 2012. 12. 9(월)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53-2 | 02-3217-6484

 

www.kimchongyung.com

 

 

variation_287x245cm_oil on canvas_2009

 

 

시원(始原)으로의 의지로 그린 명상(冥想)의 획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비평)

 

“두 눈은 일을 다 하였으니, 이제 가서

마음의 일을 하라.

네 안에 갇혀 있는 모든 이미지를

깊이 바라보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전환점』-

 

 오수환은 대상의 진술이나 묘사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상이나 그것의 소통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수환의 회화가 실현코자 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부정이며, 진술이 아니라 침묵이고, 묘사가 아니라 지우기다. 이 미학(美學)은 시각주의자의 인식론에 의존하지 않으며, 해서 의당 눈에 보이는 세계에의 충실성에 부응하지 않는다.  예컨대 사물과 빛, 채색의 긴밀한 조형적 유희를 탐닉하는 시선도 이 회화 공간에선 길을 잃고 말 것이다. 인간의 깊숙한 내면을 조사하는 표현주의적 자질도 이 세계와는 무관하다. 외부세계에 대한 반응이나 존재의 감추어진 이면을 드러내는 것, 더 잘 보게 하거나 더 잘 느끼게 만드는 것은 이 세계의 정체와 질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오수환의 회화는 사물을 기념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를 우주에 추가하는 덧없는 욕망행위에는 관심이 없다.

 이렇듯, 오수환의 붓질들에선 세계가 아니라 세계와의 결별이 목격된다. 하나의 획이 그어질 때, 그것은 세상과의 또 한 번의 결별에 대한 확인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르며 정확하게 동일한 획은 없다. 하나의 획은 결코 이전 것의 반복이거나 이후의 것에 대한 지시나 예견을 내포하지 않는다. 각각의 획들은 동일하거나 유사해 보이지만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각각 매순간 새롭게 확인되어야 하는, 세계와의 결별들에 대한 사유의 기록에 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 만물의 이치에 대한 겸허한 수용으로서의 사유이기도 하다.

 이 사유의 근거는 노자의 '무위(無爲)' 사상과 그 맥락을 공유한다. 현상계 내의 인연으로 촉발되는 모든 ‘유위(有爲)’의 것들을 이슬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불가(佛家)의 ‘제행무상(諸行無常)’도 이 미학의 지평에 융합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 마음으로 다가오는 물상(物象)들을 그 본연의 자리로, 그림자와 이슬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상징적 표지로서 무수히 반복되는 획들은 그러므로, 어떤 조형적인 훈련이나 기술의 숙달과도 혼돈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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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환은 한 때 당대사회에 대한 치열한 관심으로 사실적이고 참여적인 회화에 심취했었다. 하지만 하나의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그것들이 허용하는 입장이나 관점의 빈곤함과 그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킴으로써 불가피해지는 사유와 존재의 위축에 대한 반성이 그로 하여금 다른 예술의 길을 모색하도록 촉구했다. 존재 본연의 자유에 대한 갈증이 사회적 관여행위로 채워질 수 없다는 게 분명해 진 것이다. 유입된 추상 표현주의(American Abstract Expressionists)와 그 비정형(informal) 기법에 내포된 조형정신, 세계와 사물로부터 이탈을 시도했던 당대의 조류가 시야에 들어 온 것이 그 즈음이었다. 예컨대 마크 토비(Mark Tobey)의 경우처럼, 하나의 조형언어가 ‘세계는 한 국가며 인류는 한 형제’라는 일련의 신앙적 사유를 그 근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유로서의 예술론에 관심이 끌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오수환의 회화는 욕망이 아니라 ‘욕망에서 벗어나기’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했다. 이념적 실천이나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형태, 삶의 원천에 가장 근접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 오수환의 새로운 예술적 표지로 자리잡은 것이다.

 

 “나는 원시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본성과 원시성이 늘 관심사죠. 현대사회는 고통스럽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처방은 본성의 문제, 근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할 겁니다. … 저의 작업은 기호를 통해서 무無화시키는, 즉 의미 없는 기호를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를 무화시킴으로써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거죠. … 언어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 인간이 언어를 가지기 이전의 상태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참된 본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원시성’, 또는 시원(始原)으로의 의지를 이끄는 이러한 사유로 인해, 오수환의  추상은 서구의 추상을 수용한 당대의 한국 주류 추상과 명백하게 변별된다. 다수의 한국 추상화가들이 앵포르멜적인 경향에 매료되었던 것과 달리, 오수환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추상형식에 대해 반성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탈서구적이고 탈형식주의적인 추상으로 돌아섰다. : “계속 변화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죠. 비 오는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오수환의 추상 안에는 ‘유입’이라는 시대의 조류 자체에 대한 첨예한 문제제기가 내포되어 있다. 일테면 한국의 추상회화가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에는 등한히 했다는, 비록 유입이더라도 그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유사성이 아니라 차이에 방점을 찍어야 했음에도, 그렇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의 사유가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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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환의 회화는 일체의 장식적인, 그리고 과잉의 감각, 감정, 욕망의 요소를 배제한다. 작가 자신도 고백하듯 그의 회화과정은 명상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나의 모든 탐구는 명상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무(無)와 공(空)의 개념을 맴돈다.” 하지만, 명상적 회화, 또는 명상으로서의 회화 자체가 지나친 과거지향이나 무기력한 탈현실주의의 일환이 아닐까? 이에 답하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 필요가 있다.

 트라피스트 수도사인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1964년 출간된 자신의 저서 『파괴의 씨앗, Seeds of Destruction』에서 마틴 루서 킹이 암살당하고, 미국의 많은 도시들이 폭력적인 인종갈등으로 불타게 될 것을 예견했다. 이에 대해 당시 유명한 시민활동가인 마틴 마르티는 “은둔한 수도사가 삶의 최전선에 있는 자신들에게 어떻게 감히 인종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라며 혹평을 가했다. 하지만 3년 뒤인 1967년 머튼의 예언은 적중했다. 마르티는 『내셔널 카톨릭 리포터, National Catholic Reporter』에 머튼에 보내는 공개서한에 다음과 같이 씀으로써, 머튼의 혜안을 깍아내린 자신의 경솔함을 사과했다 : “당신이 옳았다는 것이 이제 명백해졌습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당신의 예견과 예언의 정확도입니다.”

 서구의 모더니즘 미학의 전통이 남긴 악덕(惡德)은 그 미덕을 능가하곤 하는데, 새로움에 대한 탐미와 욕망으로 지나온 모든 시간을-의미있는 시간까지- ‘지나가버린 시간’으로 만드는 감각의 포식주의가 그 가운데 하나다. 모더니즘의 지난 한 세기야말로 지혜의 전당으로서의 예술, 진지한 예술, 저항적인 예술을 한 시절 소비하고 지나가버린 것으로 만드는 폐기의 과정 아니었던가. 그래서 점차 증가해온 감소분을 제외한 남은 것들은 우매한 예술과 수퍼마켓 예술, 우스꽝스러운 예술과 자기중심적 유아성의 예술로 치우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들마저 익숙한 것이 될 때, 예술은 어디로 자신의 초식성을 채울 여전히 참신성을 지닌 희생제물을 찾아 나설 것인가?

 지나가는 것으로서의 예술, 그리고 그로 인한 발견과 발명의 분주함과 과로로 인해 오늘날 예술에서조차 ‘미디어가 데려갈 수 없는 내면의 공간’은 거의 사라졌다. 예술은 이제 ‘아침 신문에 실린 소식들이 닿지 않는 방, 또는 그런 시간이나 그런 날’에 대해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소멸될 때 우리의 마음은 다만 세계의 오만한 소음들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다.

 오수환의 명상적 회화, 명상으로서의 회화가 오히려 가장 당대적인 언어로 되돌아오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오늘날처럼 온갖 종류의 자극에 중독된 사실주의, 팝과 키취 취향, 관음적이고 포르노그래피적인 욕망이 난무할 때야말로, 그러한 사유와 언어가 재호출되어야만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본성의 기억을 되살려내려 그토록 숱한 선을 그었던 그 명상의 시간 안에는 발명에 도취되고 활동의 열광에 잠긴 우리에게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호흡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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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수환 (吳受桓) Oh, Su-Fan

 

1946년 4월 29일 생 | 1946  경남 진주 출생 | 196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 1985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교수 | 2012  서울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명예교수

 

개인전  | 2011  가나아트 부산, 부산 | 2010  가나아트 뉴욕, 뉴욕 | 2009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08  가나아트센터, 서울 | 아트사이드 베이징, 베이징 | 2007  상하이 아트페어, 갤러리 매그, 상하이 | 리씨 갤러리, 서울 | 2006  갤러리 매그, 파리 | 2005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04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03  표 갤러리, 서울 | 2002  이현 갤러리, 대구 | 갤러리 매그, 바르셀로나 | 가나아트센터, 서울 | 2001  갤러리 가나 보부르, 파리 | 2000  시대정신, 대전 시립미술관 | 가나아트센터 개관기념전, 가나아트센터 | 2인전, 매그 갤러리, 파리 | 불우이웃돕기 아트 콜렉션, 가나아트 | 한국현대판화전, 갤러리 삼성플라자 | 슈가 아트스페이스, 부산 | 1999  그림속 문자전, 가나아트센터, 서울 | 동아시아 문자예술의 현재, 예술의 전당, 서울 | 한국현대미술전, 캐나다 | 1998  갤러리 가나 보부르, 파리 | 갤러리 매그, 파리 | 1997  아키라 이케다 갤러리, 나고야 | 갤러리 가나 보부르, 파리 | 갤러리 삼성플라자 | 1995  가나화랑, 서울 | 1994  가나화랑, 서울 | 1993  갤러리 드 서울, 서울 | 1992  가나화랑, 서울 | 토마스 시갈, 보스톤 | 콘러트 브라운, 런던 | 웨터링 갤러리, 스톡홀롬 | 1990  아나 갤러리, 도쿄아트엑스포 90, 도쿄 | 두손 갤러리, 아나 갤러리, 서울 | 갤러리 부산, 부산 | 1987  두손 갤러리, 서울 | 1986  두손 갤러리, 서울 | 1979  미술회관, 서울 | 1977  문헌화랑, 서울

 

단체전  | 2000  새천년 324전, 서울시립미술전 | 현대미술12인전, 선화랑 | 한국현대미술전, 쿠웨이트 | 1999  그림속 문자전, 가나아트센터 | 동아시아 문자예술의 현재, 예술의 전당 | 한국현대미술전, 캐나다 | 1998  가나아트센터개관기념, 가나아트센터 | 1997  한중일 현대미술전, 대구문화예술회관 | 교과서미술전, 예술의 전당 | FIAC, 파리, 에펠 브랑리 | 1996  바젤아트페어, 스위스 | 앙가쥬망전, 예술의 전당, 서울 | 제11회 아세아 국제미술전, 마닐라시 미술관, 필리핀 | 1995  SAGA, 파리 | J&J화랑 개관전, LA | 1994  움직이는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서울 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 1993  한국의 이미지, 갤러리 다니엘 템프롱, 파리 | 1992  한국현대미술전, 일본 4개 도시 순회전 | NICAF, 파시피코 전시관, 요코하마 | 1991  도쿄아트엑스포, 도쿄 하루미무역센타, 도쿄 | LA. 아트 페어, 로스앤젤레스

 

 

 

vol.20121026-오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