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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진 展
역.SCAPE
exchange glances #01_60x45cm_2011
갤러리 룩스
2012. 10. 24(수) ▶ 2012. 10. 30(화) Opening : 2012. 10. 24(수) PM 6: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5 인덕빌딩 3F | 02-720-8488
exchange glances #02_60x45cm_2011
1989년 사진 공부를 위해 도불했던 사진작가 박현진(49)이 이번에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역.SCAPE”를 주제로 10월 24일(수)부터 30일(화)까지 인사동 갤러리 룩스에서 열리는 이번 개인전에는 작가가 20여 년간 끈질기게 추적해온 시선의 문제에 대한 결과물로서 꽃, 풀, 가지, 인물 등을 작가의 독특한 관점에서 포착한 사진 26점과 싱글 채널 비디오 1점이 출품된다. 박현진은 사진을 다루면서, 사람은 오른쪽과 왼쪽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피사체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스테레오 카메라를 이용하여 시선의 문제를 연구하였고, 주체에 의지에 따라 피사체가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 출품작 <Exchange Glances> 시리즈들은 시선의 주체를 피사체로 옮겨 포착한 것들이며, <Study on Exchange Glances> 시리즈들은 시선의 교차 과정을 연구한 작품들이다. 이번 박현진의 개인전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를 사진작가의 입장에서 어떻게 풀어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박현진은 1989년 성균관대 재학 중 도불, 1994년에 프랑스 베르사이유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귀국하여 일프로비젼 프로듀서를 거쳐 시엘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思考의 연장으로서의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사진을 강의했다. 주요 전시로는 <Les Visage - 얼굴들>(Gallery de Paris), <조각놀이공원>(성곡미술관), <소나무, 파리-서울> 등이 있다.
exchange glances #04_60x45cm_2011
“만남의 눈길” - 박현진의 사진작품들을 보고 - 정 대 현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박현진은 나의 사진 선생님이다. 스승의 작품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번 작품들도 강렬하고 신선하였다. 그래서 좋았다. 그리고 감상문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얼굴사진” 몇 장 그리고 “자연사진” 몇 장. 이게 무엇인가? 이게 어떻다는 것인가? 두 소재는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두 소재는 독립된 전시회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연결 고리 없이 감상문은 어떻게 쓸 수 있을 것인가? 통합적 주제 없이 어떻게 전시회를 열 것인가? 단일 주제 없이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 “만남의 눈길!” 그 연결고리의 후보를 찾아내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두 소재를 비교적 선명하게 연결 시켜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남의 눈길”은 단순히 두 소재의 연결 고리만이 아니다. 이 화두는 박현진의 사진 철학의 내용으로 부상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난 세월 동안 추적 해 온 사진 예술의 표적은 이 화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라면 그의 예술이, 그의 사람됨이, 그의 지향이 들어나는 것으로 다가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화두로 그의 작품들을 음미해 볼 만 하다. 박현진의 작품, 얼굴사진들은 두 렌즈 카메라로 찍은 것이다. 코닥의 스테레오 3D 사진기는 입체 사진을 위한 것이지만, 박현진은 두 개의 렌즈를 좌우 눈의 미간 거리 간격을 두어 구성한 카메라로 만들어, 인간 상호 관계의 시선을 찍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볼 때 한쪽 눈은 서로의 한쪽 눈에 닿지만 다른 쪽 눈은 상대방의 눈을 비켜간다는 사실에 입각해 만든 카메라이다. 피사체 사람이 카메라의 한 렌즈를 바라 볼 때 그 렌즈는 “시선의 관계 구성”으로 그 사람을 찍지만 다른 렌즈는 “시선의 관계 이탈”에서 그 사람을 찍는 것이다. 코닥 사진기와 박현진 사진기의 차이는 분명하다. 두 렌즈 카메라의 얼굴사진은 많은 것을 함축한다. 그 중의 하나는 두 렌즈 카메라가 찍는 한 사람의 시선을 두 장으로 표현하면서 하나는 “만나는 눈길”로 찍고 또 다른 하나는 “보는 눈길”로 찍는 것이다. 만나는 눈길과 보는 눈길의 사진적 표상성은 중요하다. 시신경적으로 두 눈의 영상 맺힘의 방식과 독립적으로, 이러한 표상성은 눈이 “있는 그대로” 라는 거울 표상성에 대한 대안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상성은 우리의 시각 경험이나 사진 경험이 주체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얼굴사진의 또 하나의 함축은 만나는 눈길의 정형화 가능성이다. 만나는 눈길은 두 눈이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다. 두 눈이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두 눈은 싫건 좋건 간에 인격으로 만날 때 만나는 눈길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 관계는 시작될 수 없다. 10명의 사람이 함께 작품 모나리자를 볼 때에도 이들 모두가 모나리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은 모나리자가 만나는 눈길에서 화가의 눈과 만났기 때문이다. 모나리자 효과는 만나는 눈길의 정형화를 보인다고 생각한다. 박현진의 작품, 자연사진들은 스마트폰으로 찍은 것이다. 사진작가가 전문 사진기가 아닌 스마트폰을 사용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얼굴사진을 찍기 위해선 “두 렌즈 카메라”를 고안했지만, 이제 자연사진을 찍기 위해선 스마트폰을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은 한 종류의 카메라를 고안한 착상만큼이나 중요한 사진 작품의 착상이라고 생각한다. 피사체의 소재에 따라 주제 구성의 방식이 달라지고, 이에 주목하여 카메라를 만들어 낸 작가에게는 기대할 수 있는 개념의 심각성의 전환이라 믿어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착상의 전환에 개입한 스마트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어떻게 박현진의 작품 세계에 참여하게 된 것인가? 손목시계나 안경이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이제 스마트폰은 몸의 일부가 되고 있다. 더 나아가, 시계나 안경은 제한적으로 정보 보조적 이지만, 스마트폰은 보다 광범위한 정보처리, 의사결정, 기억과 판단 방식, 관계 구성에 개입하는 확장된 마음(D. Chalmers, extended mind)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 카메라는 확장된 마음의 눈이다. 박현진의 두 렌즈 카메라가 인간의 두 눈의 시선의 작용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그의 스마트폰 사용은 확장된 마음이라는 제3의 눈의 작용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의 눈은 두 개의 눈, 육안과 연결된다. 육안은 직접적으로 인격적이다. 사람을 만날 때 일반적으로 육안으로 만나지 제3의 눈으로 만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3의 눈은 육안에 종속적이지만 그러나 기여하는 바가 있다. 육안이 놓치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여 육안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다. 박현진의 스마트폰 사진 작품은 이러한 관점으로부터의 수행이다. 박현진의 자연사진은 육안이 놓치기 쉬운 것을 보게 하고 만나게 한다. 연꽃을 만나게 하고 갈대의 의미를 보게 하며 잔디의 세밀한 연결에서 자연의 견고성을 이해하게 한다. 자연사진은 천연색의 인상으로서가 아니라 흑백의 탈색된 관념으로 다가 온다. 사진을 찍으면서 이미 추상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연을 만난다는 것은 사물로서가 아니라 의미로서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 속에는 이미 선택과 지향이 들어 있어 자연이 인격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선명하기 보다는 흔들리고, 선언적이기 보다는 함축적인데서 만남의 공간, 의미의 가능성이 들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연사진에서 추구할 수 있는 자연과의 만남의 조건들일 것이다. 이제야 물음이 풀리는 것 같다. 긴 세월을 침묵으로 지낸 사진작가의 최초의 개인전 작품들이 왜 “얼굴사진”이고 왜 “자연사진”인가의 물음이 풀리는 것 같다. “만남의 눈길”이라는 화두로 그렇게 오래 그렇게 진지하게 추구 해 왔다는 치열함이 보인다. 작가의 절제성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한 인간의 엄격함이 들어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광기의 산만한 시대에 얼마나 고집스런 단일 주제인가? 박현진은 “사진을 찍기 위해 여행하지 말라, 일상에서 새로움을 찾으라.”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기 작품들로 그의 가르침을 또한 이렇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study on exchange glances #02_50x100cm_2009
<비평문> “시선의 역 지대에 서서” 이 근 용 <미술비평, 전시기획자>
얼마나 기다렸던 전시인가. 내가 사진작가 박현진을 알게 된 후 12년 만에 처음 보는 그만의 전시이자 그의 생애 첫 개인전이다. 나는 지난 12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그의 작품을 보아왔고, 작품을 논하고, 일도 도모했으며, 삶을 얘기했지만, 나에게 있어 그의 작품이 세상에 드러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20년 동안 ‘작품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단히 인색했다. 나는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할 때마다 쉼 없는 흔적들이 담긴 이미지의 파편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그저 “습작”이라고만 했다. 왜일까? ‘작품들’과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자신의 것이 너무 작아 보였을까? 그 “습작”은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입을 통해 “작품”이 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얼마 전 나와 함께 일을 하던 중 뜬금없이 내게 “전시를 한다.”고 했다. 항상 기다려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대조차 조심스러웠던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나는 그의 결정에 반색을 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그가 전시를 결정한 이유가 궁금했고, 또 한편에서는 두렵기까지 했다. 나는 전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던 그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얼핏 보아도 1천 점이 넘어가는 이미지들을 보았다. 그 안에는 오래 전 “습작”이라고 말했던 것들이 세월에 익어 “작품”이 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새로운 모습들이 내 육안의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알기에 그 방대한 양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작가 박현진’으로 만드느냐.”였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인물, 꽃, 가지, 나무, 정물, 풍경 등 사진이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탈고 직전 대하소설의 원고들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어느 누구보다 작가라고 여겼던 박현진의 시선에는 분명 “집요하게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으리라.”라는 확신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지점을 발견했다. 그 지점은 바로 ‘역(?) 지대’였다. ‘역(?, liminality)’이란 ‘문지방’을 뜻한다. 이곳은 여기와 저기를 넘나드는 교량과 같은 장소이며, 하나의 가장자리와 다른 하나의 가장자리가 교차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도시 속에서는 출발점과 도착점이 분명한 ‘길(road)’이 아니라 항상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소동이 끊이지 않는 ‘거리(street)’이며,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이 충돌하고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누군가는 이 장소를 꺼리지만, 어떤 이에게 이 곳은 새로움이 탄생할 수 있는 잠재의 공간이기도 하다. 박현진의 사진은 이 지점, ‘역 지대’에 걸려 있었다. 어느 작품에서도 분명한 대상을 포착하기 힘들다. 보는 시선에 따라 주체와 객체가 달라진다. 꽃이 있되, 시선은 가지에 걸려 있으며, 가지가 있되, 시작점을 확인할 수 없다. 시작점은 있되, 줄기는 무한히 펼쳐진다. 같은 시간과 장소의 같은 인물의 시선은 여기와 저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여기와 저기 사이에는 무한한 공간 에너지가 잠식해있다. 마치 사진작가이면서 수많은 ‘작품들’과 마주해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이 그 사진들 안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박현진의 사진들은 그 두 개의 시선 사이에서 활기를 잃지 않는다.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한 쪽 눈을 가릴 때와 마찬가지로 시점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피사체는 동일성을 유지한다.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은 그에게 있어 양 끝의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그리고 양쪽 눈 사이의 간격은 피사체를 포착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 즉 ‘역 지대’를 형성한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을 때, 나는 상대방의 한쪽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서로 같이 눈을 응시하고 있을 때는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지만, 순간 다른 쪽 눈을 바라보게 되면 시선의 교차점은 파괴되고 만다. 결국 이것은 보는 이의 의지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시선의 교차는 이뤄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사체는 양 끝 가장자리를 넘나들며, 보는 사람, 즉 주체의 시선에 따라 자신의 자리가 결정된다. 하지만 실제로 피사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혹은 외부적 환경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박현진은 사진의 주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찍히는 대상으로 급회전시킨다. 따라서 피사체 새로운 주체가 되어 보는 사람을 보게 만듦으로써 보는 사람의 주관적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것이 자신의 사진을 ‘역 지대’에 걸리게 만드는 박현진만의 특별한 시선이다. 이번 박현진의 첫 개인전에서 관객들은 처음 맞이하게 되는 그의 꽃, 풀, 가지들의 다소 낯선 앵글들에서 시선의 불편함을 가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두 개의 패널을 이용한 초상 사진 연작들과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에서 두 개 시선의 교차점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시장을 나오면서 그 시선들의 종합이 그의 꽃, 풀, 가지들이 포착된 단일 패널의 사진들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게 될 것이다. 물론 박현진의 사진은 시선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피사체들은 있던 장소에서 떨어져 나와 그의 필름 속에서 화석화된다. 빈티지한 흑백 프린트에 녹아 든 꽃, 풀, 가지들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 받고 그토록 염원했던 “작품”으로 탄생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박현진의 사진은 1천여 점에서 추려낸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에는 내가 보지 못한 더 많은 생명들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음 작품을 보려면 또 나는 12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번 첫 개인전을 통해 “습작”을 “작품”으로 만드는 방법을 배웠기에 그의 “작품”에 대한 두려움은 반감되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시선의 ‘역 지대’에서 그가 발견하게 될 시선의 철학, 사진의 철학, 예술의 철학, 삶의 철학은 무엇일까? 벌써부터 나는 그것이 궁금해진다.
study on exchange glances #05_50x100cm_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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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21024-박현진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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