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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현 展
ROAD2012-8_116.7x65cm_oil on canvas_2012
ROAD2012-9_162.1x90cm_oil on canvas_2012
숲을 걷다가 길을 생각하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루스트는 숲속을 산책하다가 갈림길을 만난다. 그리고 한쪽 길을 선택해 걸어가면서 미처 가보지 못한 다른 한 길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시 <가지 않은 길>에 담았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시의 방점은 간 길보다는 가지 않은 길에 찍힌다. 인생도 마찬가지. 흔히 사람들의 의식은 자신이 살아온 삶이며 지금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자신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삶이며 혹 자신이 살았을 수도 있는 삶을 향한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나 인간은 몸과 의식을 분리시켜 의식을 몸 밖으로 멀리 내보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의식은 대개 현재에 정박하지 못한 채 현재의 변방을 떠돈다. 어쩌면 이중분열과 다중분열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일지도 모르고, 부조리한 인간을 증명해주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여기에 없다거나, 나는 내가 하는 말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자크 라캉의 말은 그런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다시 시로 돌아가 보면, 가지 않은 길은 어쩌면 가지 못한 길일지도 모른다. 가지 않은 길과 가지 못한 길은 다르다. 살아가다 보면 허다한 갈림길에 맞닥트리고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때마다 나는 능동적으로 한 길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한 발짝 비켜서 보면 그 선택은 수동적으로 선택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거시적 관점에서 운명과 필연이 미시적 관점에서 적극적인 선택과 의식적인 배제로 비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가부를 누가 알랴. 분명한 것은 인간이 반쪽 삶을 산다는 것이며, 따라서 결여가 자기분열과 함께 인간의 또 다른 실존적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결여는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술은 말하자면 삶이 결여하고 있는, 삶을 보충해줄 수 있는, 삶의 이유를 해명해줄 수 있는 일에 복무하는 것일 수 있다.
ROAD2012-10_162.1x90cm_oil on canvas_2012
길은 길이다. 그리고 길은 삶의 메타포이기도 하다. 삶을 비유하기 위해 호출되는 개념들이 여럿 있지만, 그 중 가장 유력한 경우가 길이다. 오죽하면 가장 대중적 예술인 영화에는 로드무비라는 장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작가 류재현은 시종 길을 그린다. 그리고 길은 작가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하다. 그에게 길은 길 자체이면서, 동시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을 은유하며,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태도를 반영하고 드러내는 구실이며 계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길은 삶의 상징이며 존재의 상징이다. 작가는 숲길을 그린다. 그 길들 중에는 더러 숲속을 걷다가 실제로 무심결에 맞닥트릴 법한 갈림길도 있다. 그 길 앞에서 나는 길 자체가 주는 감각적 쾌감을 즐길 수도 있고, 왜 갈림길인지, 다른 사람들은 그 갈림길 중 어느 길로 갔을지, 그리고 그렇게 가 닿은 길 끝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었을지 사색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길 자체의 감각적 쾌감을 즐길 수 있게 해주고, 그 길 위를 지나쳤을 사람들의 현실과 현재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떻게 길을 그리게 되었을까. 언제부터 길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을까. 제자의 죽음이 그 계기며 동기가 된다.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는 도로 위에서 제자가 죽었다. 그리고 작가는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며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 선다. 그 길 위의 풍경은 온통 네거티브로 보였다. 아마도 제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풍경이 그랬을 것이다. 세상이 졸지에 낯설게 보였을 것이다. 네거티브는 실제와는 거꾸로 보이는 음영이며 색깔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전이며 부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인정하기 싫은 심리적 현실을 대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위에, 길 위에, 죽음 위에 꽃 한 송이를 바친다. 그렇게 그 날 이후 작가는 길을 그리게 되었다.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일들을 그리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 작가에게 길은 길 자체가 아니었다. 그 자체 가치중립적이고 중성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기호도 아니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실제 하는 장소였고, 그 사건을 흔적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구체적인 실체였다. 그리고 이후 길은 점차 좀 더 보편적인 개념을 의미하게 되었다. 삶의 메타포라는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조건을 표상하게 되었다. 이처럼 처음에 길은 구체적인 사건과 연동된 것인 만큼 그 실체가 뚜렷했다. 그런데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그림들 속에서 길은 비록 없다고는 할 수가 없지만 그 실체가 상대적으로 더 암시적이게 된다. 그림들을 보면 길보다는 그 속에 길을 품고 있는 숲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길보다는 길을 걷다가 보이는 풍경에 방점이 찍힌다. 굳이 말하자면 숲길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숲길은 흡사 사진이나 자연도감을 연상시킬 만큼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세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서 언제 어디선가 가본듯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화면을 풀사이즈로 가득 채우고 있는 숲이 마치 실제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몰라서 그렇지 자연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그 숲속에 자라는 나무며 꽃들과 들풀들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을 품고 있는 숲과 어둑한 초록을 부드럽고 따스하게 감싸는 빛, 투명하게 하늘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흐르는 바람의 질감과 대기의 기운이 감지될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다.
ROAD2012-13_116.7x65cm_oil on canvas_2012
마치 실제로 숲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이 생생한 느낌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분명한 것은 작가가 세세하게 보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모르긴 해도 느릿하게 걷다가 쪼그려 앉아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그렇게 본 것을 생생한 느낌으로 전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작가가 시종 천착해온 길이란 주제에 주목해 보자. 길을 지나가는 방법에는 여러 질이 있다. 걸어서 지나갈 수도 있고, 자동차를 타고 지나갈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갈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 가운데 걸어서 가는 방법을 세계 속으로 들어가 세계와 주체가 하나로 동화되는 과정이며 행위라고 본다. 이에 반해 이동수단을 이용하는 방법은 다만 세계의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이동수단은 말 그대로 길을 건너가게 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길을 건너가는 것은 하나같지만 과정에 방점이 찍히는 경우와 목적(지)에 무게중심이 실리는 경우가 다르다. 벤야민이 보기에 진정한 삶의 태도는 과정에 있지 목적에 있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세계에 동화되고 세계의 품성을 탐색하는 주체가 산책자들이다. 문명은 산책자들의 몫이며, 특히 정신문명은 이 문명의 산책자들이 만든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에 해당하는 벤야민 식 버전으로 보면 되겠다. 비록 도시의 생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자연이라고 해서 그 경우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의 숨결이며 생기는 누가 맡을 것이며, 자연의 본성은 누가 캐는지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문명이든 자연이든 그것을 만들고 가꾸고 사색하는 주체는 따로 있는 법이다. 작가는 숲을 그릴 때 어두운 색깔부터 밝은 색깔 순으로 그려 나간다. 그래서 숲 그림의 대부분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고, 따라서 마치 어둠이 숲의 본성 같다. 혹은 어둠 속에 숲의 본성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불가지론이다. 인간의 인식이 가 닿을 수가 없고 인간의 지식으로 해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숲이다. 인간의 인식에 자기를 다 내어준 숲, 신비의 베일이 벗겨진 숲, 신화를 박탈당한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닌 한갓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 숲과 질료는 다르다. 숲은 질료로 환원되지가 않는다. 작가는 어스름한 숲속에 적당한 빛을 분배한다. 그 빛이 마치 어둑한 숲이 품고 있는 둥지 같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놓듯 일일이 세필로 그린, 비현실적일 정도로 세세하게 그려진 숲 그림이 살아있는 숲의 본성을 향유하게 하고, 숲길이며 길의 본성에 대해서 사색하게 한다.
ROAD2012-14_72.7x50cm_oil on canvas_2012
ROAD2012-15_90.9x45cm_oil on canvas_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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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재현 展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개인전 및 초대전 | 2008 한국소리문화의 전당/전주2010 서신갤러리/전주 | 2012 서신갤러리/전주, 인사아트센터 도립미술관 분관/서울 아트페어 및 단체전 | 1985 International Student Art Exhibition KOBE(코베) | 1997 청년작가가 본 전북의 산하전 (우진문화공간/전주) | 1997 전북현대미술의 단면전 (삼성문화회관/전주) | 1996~2011 녹색종이전 (전북예술회관,서신갤러리, 우진문화공간/전주) | 2002~2011 건지전 (공평아트센터/서울) | 2006~2011 VISA전 (전북예술회관/전주) | 2008 JBAF 전북아트페어(한국소리문화의 전당/전주) | 2008 전라북도립미술관초대-미술로 소통하기전 (전라북도립미술관/전주) | 2008 꽃피는 미술시장전(서신갤러리/전주) | 2009 2009전북미술의 비전과 가능성전(갤러리라메르/서울) | 2009 경기전과 사람들전(전북예술회관/전주) | 2009 CIGE(중국국제무역센터/베이징) | 2009 아시아 탑 갤러리 호텔아트페어(그랜드하야트/서울) | 2009 대한민국청년작가초대전(한전갤러리/서울) | 2009 전북미술의 비전-극사실주의회화(전북예술회관/전주) | 2009 자화상전(서신갤러리/전주) | 2009 꽃피는 미술시장전 (서신갤러리/전주) | 2010 제1회 블루닷 아트페스티벌(갤러리 블루닷엠/창원) | 2010 자화상전(서신갤러리/전주) | 2010 KIAF(코엑스/서울) | 2010 꽃피는 미술시장전(서신갤러리/전주) | 2011 회화를 회화이게 하는것 전(아카갤러리/전주) | 2011 화랑미술제(코엑스/서울) | 2011 호산옥션(리츠칼튼호델/상하이) | 2011 전북을보다전(도청갤러리/전주) | 2011 광주국제아트페어(김대중컨벤션센터/광주) | 2011 KIAF(코엑스/서울) | 2011 도어즈아트페어(임페리얼펠리스호텔/서울) | 2011 AAF Singapol(싱가폴) | 2011 모빌리티전(교동아트센터/전주) | 2011 꽃피는 미술시장 전(서신갤러리/전주) | 2011 호산옥션(리츠칼튼호델/상하이) | 2012 Cite internationale des art 레지던시(가나아트/파리) | 2012 화랑미술제(코엑스/서울) | 2012 그림 속 전라도전(롯데갤러리/광주) | 2012 BAMA2012(해운대 센텀호텔/부산) | 2012 호산옥션(리츠칼튼호텔/상하이)
소장 | 전북도립미술관/전라북도교육청 | 우진문화재단/미래병원/서신갤러리 | Galerie Lazarew(파리) 현재 | 한국미협, 녹색종이, 건지, VISA 회원 E-mail | pullnal@hanmail.net | blog | www.pullnal.blog.m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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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20718-류재현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