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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風玲 展
Fairy Tale
Automobile-1_Ø130x6cm_Acrylic on canvas_2008
갤러리 604
2011. 12. 23(금) ▶ 2012. 1. 21(토) 부산시 중구 중앙동 2가 49-7 | 051-245-5259
Country of automobile-2_60x200x6cm_Acrylic on canvas_2008
갤러리 604H에서는 2011년의 마지막 전시로 중국의 여성작가 친펑링 Qin Fengling 秦風玲의 국내 첫 전시를 마련했다. 작가 왕루엔의 부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친펑링은 정규미술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 그녀는 붓을 사용하는 일반적인 작가들과는 달리 아크릴물감을 튜브 째로 캔버스에 짜 형상을 만들어낸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형상들 위에 몇 개의 점을 찍어 입과 눈을 추가하면 그것은 사람이 된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마치 색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것은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 이 군상들은 아주 작지만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함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살아간다. 그녀는 “모든 사람은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사회에서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흔적이 남는다. 특히 중국에서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적인 현상이다.” 라며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녀의 작품은 사람들 속의 화합과 갈등, 즉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 복잡하고 어려울 것만 같은 이러한 사회적 주제를 색색깔의 옷을 입은 다양하고 귀여운 인간들의 군상으로 표현해낸 친펑링의 이번 전시에서는 평면과 입체작품 10여 점이 전시 된다.
Insect_84x64x4cm_Acrylic on canvas_2008
사람이 미술가가 될 때 - 친펑링의 작품 치바 시게오
1. 무엇이 다른가? 베이징에서 친펑링의 작품을 보았다. 2008년 시카고에서의 개인전 도록에 실린 그녀의 「스테이트먼트」와 왕바오주에 의한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사람이 화가가 된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라고. 그녀의 부친이 국무원의 미술관계 부서에서 일했기에 어린 시절부터 미술이나 디자인과 친근했던 점, 왕루엔과 결혼한 것, 그림은 독학으로 배운 것, 남편과 그 친구인 미술가나 평론가들의 토론을 옆에서 들으며 지낸 점, 하지만 그림에 관해서는 독학이었던 점.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일단 관심이 없다. 그런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한다-사람이 화가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어째서 이런 질문이 나왔는가 하면, 내게는 그녀의 작품이 상당히 불가사의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을 앞에 두고서 보통의 미술작품처럼 감상하고 보통의 미술작품으로 논하면 뭔가가 들어맞지 않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미술 논리와 역사를 끌어다가 그 말투와 용어로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고 비평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이건 뭔가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어 견딜 수가 없다. 사회적 주제를 어른의 「동화(fairy tale)」풍으로 표현한다-그녀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이 일반적인 시각에 따른다면 「거대한 것(마천루, 고층맨션 따위)」(이것은 다양한 상징이 될 수 있다) 과 군중으로 다루어진 작고 작은 인간들과의 대비, 갈등을 표현한 셈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아무리 애를 써도 내 펜이 그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왜일까? 이럴 때는 새로이 작품 앞에 설 수 밖에 없다. 성급한 해석을 그만두고 작품 그 자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2. 「안쪽」 가령 친펑링의 작품을 모르는 관객이 그녀의 작품 앞에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작품 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거리를 두고 볼 필요가 있으므로 우선 조금 떨어져서 서본다. 그러면 뭔가 작은 것이 화면을 꽉 채우고 있는데, 너무 작기 때문에 시력이 꽤 좋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다. 「거대한 것」만이 보인다. 그래서는 작품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물론 가까이 다가서 본다. 그러면 그 작은 것이 「인간들」임을 알 수 있다. 즉, 다가가지 않으면 작품의 주제를 알 수 없고, 떨어져 있으면 작은 인간들을 속박하고 있는 환경 (「거대한 것」) 밖에 볼 수 없다. 가까이 다가서서 비로서 주역이 인간들임을, 그리고 인간들이 「거대한 것」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녀 작품 앞에 서면 우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근시안적인 것이 아니다. 그녀 작품은 관객을 잡아당기고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주제 안에, 주제의 권내에 들어가지 않으면 주제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런 구심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녀의 작품은 구심력에 이끌려 그 안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을, 그리고 「안쪽」이라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내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다음으로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난다. 관객은 언제까지나 화면에 눈을 박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에 조금 떨어진다. 그러면 이번에는 다시 「작은 인간」들을 알아볼 수 없게 되고 「거대한 것」만이 보이게 된다. 알아볼 수는 없어도 일단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으니 그것이 인간임도, 무엇이 주제인가도 이미 이해하고 있다. 즉,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은 추상화면 같거나 고층건축물(뿐)이거나 한다. 작품 내용에 대한 지적 이해와 눈에 비치는 시각적인 사실이 동일하지 않다. 혹 여러분은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실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그런 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가까이 다가갔을 때와 떨어졌을 때의 작품이 다르다. 그것이 친펑링의 작품이며 그녀 작품의 불가사의함이다. 예를 들면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중에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트롱프뢰유, 일종의 일루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친펑링의 작품은 같은 작품이 두 개의 작품이기도 하다. 두 개의 다른 작품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인데 두 개의 작품이기도 하다. 하나의 작품이 두 개의 작품을 내포하고 있다. 이 「내포」는 「안쪽」이라는 인상과 이어진다.
NO-Target 4_250x200x6cm_Acrylic on canvas_2008
3. 얇은 입체 이것을 「형식」측면에서 보면 또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떨어져 있으면 울퉁불퉁 두껍게 칠해진 화면밖에 보이지 않지만 다가서면 그 「울퉁불퉁」은 작은 인간들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려져 있다기보다 작다고는 해도 입체적인 것으로서, 그것들이 화면에 가득 붙어있다. 즉, 지극히 작게 만들어진 입체 인간들이 평면을 채우고 있다. 「거대한 것」 위에, 안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더욱 자세히 보면 「거대한 것」의 「골조」선 또한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작은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튜브에서 짜낸 물감으로 만들었다. 고층 아파트 등의 골조도 그 안의 작은 인간들도, 양쪽 모두 소위 「얇은 입체물」로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 점이 주목받지도 중시되지도 않은 듯 하지만, 친펑링의 「작품」은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니다. 이는 중요한 사실이다. 그것은 릴리프가 아니라 「얇은 입체」인 것이다. 예를 들면 그녀는 색깔 입힌 크림을 튜브에서 짜내 케이크 시트 위를 장식하듯 그림을 그린다. 아니, 「거대한 것」을 골조 삼아 만들고 작고 작은 인간들을 만들어낸다. 작아도 인간인 「것」들을 탄생시킨다. 그렇다. 그녀의 행위는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다르다! 「얇지」만 「입체」임은, 그녀가 손끝으로 하나씩 부드럽게 매우 정성껏 각각에 생명을 부여하듯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평면 위에 평면적으로 그리는 것은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손은, 아무리 작아도 3차원의 두께를 가진 것밖에 손으로 만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면 리얼리티가 없다. 존재하고 살아있는 것을 사람은 손으로 만져서 확인한다. 이 작은 인간들이 귀여운 것은 사이즈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자기 자식처럼 하나씩 자신의 손끝으로 이 세계에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세계 속을 향해, 아니 그녀 자신의 안쪽 세계를 향해서, 이다. 이런 작고 작은 인간들을 계속 만들어냄으로써 그녀의 세계는 자신의 안쪽을 향해 펼쳐진다.
4. 손이 만들어내고 손으로 만진다 「하나이되 둘」인 것도「얇은 입체」인 것도 친펑링의 작품이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은 보는 시각을 바꾸면 「분열」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의미에서는 귀엽고 작은 인간들 (작은 상황)과 사회적인 주제 (큰 상황) 사이에도 하나의 분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 「분열」은 마이너스 요소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그녀 작품의 특색인 듯 한 느낌이 든다. 당최 현대의 미술표현에 있어 회화라던가 조각이라는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모순도 의문도 갈등도 없이 그 틀 안에 표현이 간단히 수용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녀의 제작 동기의 요점을 추측해 본다 - 어찌됐건 내 손으로 만들고 싶다, 그런 것에만 리얼리티를 느낀다. 그렇게 요란하지 않아도 되지만 아무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범위밖에 나는 흥미도 리얼리티도 느끼지 않는다. 이 세상의 주역은 인간 외에는 없다. 따라서 나는 인간들을 만들고 싶다. 작아도 좋으니까 만들고 싶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들을 존재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크고 작은 문제며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다. 물론 정치나 사회 문제도 있지만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도 또한 무수한 문제나 어려움이 있다. 우선 그런 문제나 어려움이 큰일이고 중요하다. 그런 문제나 어려움에 부딪혀가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인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 인간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내겐 표현의 의미가 없다. 이런 게 아닐까? 물론 그녀는 이미 한편에서 자신의 표현주제는 사회적인 것이라 밝혔다. 그렇다면, 작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작은 상황)과 사회적 주제(큰 상황) 사이에 모순 혹은 분열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녀가 이 모순 내지 분열을 너무나도 간단히 뛰어넘고 있음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런 것이 가능한 「형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자신의 손끝으로 작은 인간을 탄생시킨다는 형식이 되어 실현되었다. 작고 무수한 인간들이라는 마이크로코스모스적인 것이 된 것은 그녀의 감각, 직감에 다름 아니다. 즉, 그 외의 이유는 없다. 미술가가 일반적으로 걷는 길을 지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미술형식 문제를 고려한 끝에 나온 것도 아니거니와 주제를 고려해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이 점이 그녀의 독창적인 부분이다. 우선 보통의 미술가들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보통의 미술가들의 경우, 파괴적인 것, 종래의 것과는 다른 것, 혁신적인 것을 창조하려는 경우라도 「상도常道」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도」는 시대가 크게 바뀌면 변할지도 모르겠으나, 예를 들어 현대에는 현대의 「상도」가 있다. 하지만 친펑링은 그러한 「상도」를 아주 간단히 무시한다. 그런 「상도」따위 「일상」앞에서는 문제도 아니다. 내지는 마치 다른 우주에서 온 사람처럼 휘리릭 초월해 버린다. 그래서 일반적인 미술 시각으로는 반대로 다소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분열」이란, 보통의 미술가나 미술관계자의 눈에 「분열」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분열」도 아무것도 아니다. 나 자신도 보통의 미술관계자 중 한 명이지만, 그녀의 「분열」이 마이너스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선」을 초월했음에서 유래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선」, 즉 「표현이라는 선」이다. 그녀의 표현은 하나의 표현선을 넘은 곳에서 성립한다. 굳이 말하자면, 「일상」을 향해 「표현」을 초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상에 그녀는 하나의 「표현」을 탄생시키고 있다.
Sofa_130x200x6cm_Acrylic on canvas_2007
5. 일상 「스테이트먼트」나 「인터뷰」의 발언에서 그녀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 얽매여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미술은 자신에게 있어 먹는 것, 마시는 것,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것, 새로운 옷을 사는 것, 그런 것과 마찬가지라는 의미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일상생활의 연장, 연장이라기보다 일상생활의 하나이며, 당연히 미술은 소위 하루하루의 생활, 일상적인 환경의 온갖 사항들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그것들을 반영하고도 있고 그것들로 이루어져 있기조차 하다. 이 발언의 연장으로 그녀는 몇 번이나 「나는 미술가가 되려고 생각했다, 라고 말한 적 따위 지금까지 한 번도 없다」고 확실히 단정 짓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렇기에 「나는 지금도 예술가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과 마찬가지 내용인데, 「그릴 때 나는 열정에 의존하거나 하지 않는다. 열정이라던가 격정이란 것은 “돌연”이란 것, 갑자기 다가오는 뭔가로서, 내게는 그런 것이 없다」라는 발언이다. 말을 바꾸면 이것은 「영감(인스필레이션)」의 부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발언으로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열정」이나 「영감」에 의존함으로써 뭔가를 탄생시키거나 할수는 없다는 것이리라. 내지는 그녀에게 있어서 미술이란 열정 따위와는 관계없는 사항이란 것이리라. 그저 일상의 평범한 생활에서 태어나 일상생활 속에서 일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활인이, 성숙한 성인여성이 열정과는 관계없이 담담하게 하루하루 작고 작은 인간들을 계속 만들어간다. 내 인상으로는 이런 내용을 발언할 때의 그녀의 어조는 상당히 강하다. 독자에게 그것을 명확히, 강하고 확실하게 전하려 한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따위 나는 모른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미술 따위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상관없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쇼핑하러 나가고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고 그림을 그리고 식료품을 사러 시장에 가고 저녁에 다시 밥을 먹고 TV를 보거나 하고, 그리고 잔다. 그 뿐이다」. 나는 그녀의 이런 발언에서 「도메스틱」이란 걸 느낀다. 일상에서 유래하고 일상에서 떨어지지 않고 일상에서 일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해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녀는 소위 「취미 화가」가 아니고 「아마추어 화가」도 아니다.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알고 계실지 - 미술이 이런 의미의 「도메스틱」에서 벗어나지 않음에 이렇게까지 철저했던 적은 여태껏 없었음을? 따라서 그녀의 작품에 대해 내가 말하는 「도메스틱」이란, 일상이라는 좁은 세계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서 그곳에서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소위 「건너편」까지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일상의 건너편이란, 여기서는 「바깥쪽」세계가 아니다. 「안쪽」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안쪽」을 뒤집어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안쪽」을 뒤집어도 그것이 「바깥쪽」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6. 건너편에서 나타나는 작품 확실히 친펑링은 미술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 따위 한 번도 없다. 지금도 그녀는 미술가가 아니다. 지금은 성숙한 한 사람의 성인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미술」쪽이 그녀를 놓아두지 않는다. 어째서라니, 그녀는 평범하게 일상생활을 하고 있을 뿐인데 그녀의 일상생활의 「어딘가」가 뒤집어져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술가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뒤집어져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뒤집을 뿐이므로. 따라서 그녀 작품의 매력은, 뒤집어진 것을 다시 한 번 뒤집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녀가 작고 작은 인간들을 탄생시킴으로서 만들어진 세계는 완결된 세계이다. 그러나 작품으로 완결되어 있는 건 아니다. 그렇게 말해 버리면, 그렇게 이해해 버리면, 거기에 모처럼 나타난 그녀의 세계를 뒤집어 버리게 된다. 그녀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이지 작품이 아니다. 그런 하나의 사건이 건너편에서 이편을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것이 친펑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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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in Fengling, 秦風玲
1957 Born in Beijing | 1995 Self-taught and began | Lives and works in Beijing
Solo Exhibitions | 2008 “Multitude”, Kasia Kay Art Projects, Chicago (curated by David A. Parker) | 《QIN FENGLING》, OPERA GALLERY, Hong Kong | 2006 WOW!, WHITE SPACE BEIJING, Beijing, China
Group Exhibitions | 2011 《A Time of Common & Beauty》- the works by ten female artists, Yuan Art Museum, Beijing, China | 《Chinese Contemporary Art》, Pearl Lam Fine Art, Shang Hai, China | 2010 “Selected Works From The White Rabbit Collection”, White Rabbit chinese contemporary Art Gallery, Sydney, Australia | 2009 “Individual”, JoyArt, Beijing, China | “The (un)Real City”, Kasia Kay Art Projects, Chicago (curated by Stefania Carrozzini) | “NEXT Art Fair”, Kasia Kay Art Projects, Chicago, USA | 2008 “UNITED in Art”, De Vos Art Museum, Marquette MI, USA | “Chinese Fantasy”, Found Museum, Beijing, China | “Charm of Art-Collection of Chinese Contemporary Arts”, Today Museum, Beijing, China | 2007 The First Today’s / Energy:Spirit·Body·Material / Beijing, Today Art Museum, Beijing, China | Neo - Painting from China, Kamakura Gallery, Japan | 2006 POST NORA, Today Art Museum, Beijing, China | Starving Artists, C5 Art, Beijing, China | “Memory - Imagination - Fun”, Gana Art Center, Seoul, Korea | 2005 Painting-unrealism, WHITE SPACE BEIJING, Beijing, China | 1995 “Abstract Paintings on Paper by Wang Luyan and Qin Fengling”, Red Gate Gallery, Beiji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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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11223-秦風玲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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