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모 展

 

Artificiality as Idleness, or Art

 

Idleness_130x162cm_닥_2010

 

 

금호미술관

 

2011. 11. 17 (목) ▶ 2011. 11. 27 (일)

Opening : 2011. 11. 19 (토) PM 3:00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78 | T. 02-720-5114 (월요일 휴무)

 

www.kumhomuseum.com

 

 

Idleness_120x60cm_닥_2010

 

 

무위(無爲)로서의 인위(人爲) 혹은 예술

 

미학박사 양효실

가만히 나무 옆에, '멋대로' 뻗어나가는 넝쿨 식물 앞에, 무성한 길가 풀숲에 선다. 하릴없는 사람처럼, 한동안 홀대했던 동무처럼 '이것'에 대해 겸손히 생각한다. 이것은 어떻게 여기에 있어졌고, 어쩌다 이런 모양이 되었을까. 똑같은 것은 없는 세상에서 오직 이것 하나를 생각한다. 따라서 물, 바람, 하늘, 공기, 흙처럼 이것이면서 이것이 아닌 것들이 차례차례 무대에 등장한다. 이것은 텅 빈 듯 보이지만 사실은 들어갈 틈 하나 없이 빽빽한 밀도, 에너지, 대기의 저항에 맞서 아니 대기의 저항에 저의 몸을 내맡긴 채 '춤'을 추는 중인지 모른다. 여기는 정지한 것은 없는, 목적도 이유도 없는, 그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니까. 그것을 '춤'말고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전쟁이나 싸움이란 말로는 번역이 안 되는 이것을 말이다. 쉬임없이 흐르고 흐르며 고정되는 일 없이 바뀌는 중에도 마치 '자기'인 양 '이름'을 가진 이것을. 하나의 개체(個體)가 아닌 전체일 뿐인 이것, 이 풍경을. 오독(誤讀)은 어떤 방패, 방어막이 되어 주고, 이제 인간적인 세상이 펼쳐진다. 나는 이것을 나무라 부르고 넝쿨이라고 부르고 이름 모를 풀이라고 부른다. 이름을 얻고, 차이와  내적 동일성을 획득하고 ‘자기’의 좌표를 얻는 중에 관계, 에너지, 흐름으로서의 이것은 사라진다. 있음에 집중하느라 정녕 시선이 닿지 않았던 여백, 내뱉어진 소리들 때문에 들을 수 없었던 침묵, 살아야했으므로 자주 돌보지 못한 죽음, 머무르다가 잊었던 떠남과 같은 것들, 즉 오독 뒤켠으로 버려지고 제거된 것을 나는 이것에 대해, 이것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던 중에 만나게 된다. 이것은 믿음과 확신, 증거에 내몰린 인간적 삶의 바깥, 내가 정녕 배려할 수 없었던 삶을 생각할 때에야 나타난다. 나는 인간적 질서와 반(反)인간적인 풍경 사이를 횡단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인간적인 세계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너무 오래 서성이는 사람은 실종, 실어, 실명될 것이다. 빙산의 일각을 놓고 빙산을 사유하려면, 보이는 것을 놓고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면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고개를 곧 넘어가는 태양으로도 충분하다. 한 알의 씨앗에 들어있는 우주를 헤아리는 경이, 하나의 이름이 감추고 있는 전체의 경이를 경험할 순간은 도처에  있다. 인간의 무대에서 사소하게 치부되는 것들, 엑스트라들, 곧 시들거나 베어질지 모르는 하찮은 것들은, 거지로 변장할 줄 아는 임금님처럼, 득도한 빈자처럼 벌써 당신 옆을 지나갔을지 모른다. 인간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춤 한 소절, 지금 부는 바람, 삼일 뒤 내릴 비처럼 아무 것도 아니면서 거의 모두일 것이다. 내가 너이고 관계이고 전체이고 우주라는 진실을 인간의 세상에서 깨달으려는 안간힘. 삶이 춤이 아닌 세상에서 춤을 추려는 안간힘. 한그루 나무, 풀 한포기, 넝쿨식물의 무늬를 방편으로 삼고 차이를 넘어서려는 안간힘. 자연은 분리와 차이가 없는 전체(holism), 기(氣), 흐름(flux)이다. 자연은 내재적 원리에 근거해 움직이는 필연의 세계이고, 그러므로 모든 것은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타율적이고, 하나의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돌고 돌아 같은 자리로 다르게 돌아오는 흐름이다. 나는 내가 인간이 되면서 저기에서 나왔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기회란 ‘죽음’의 은유 외엔 없으므로, 대신에 나는 그곳을 진짜 환상으로 붙든 채 이곳의 거짓 환상에 속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훈육된 이기심에 짓눌린 내가 혐오스러울 때, 사랑이 덧내는 상처를 외면하고 싶어질 때, 말의 유능이 침묵의 무능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엄습할 때 가만히 이것들 앞에 선다. 이것들의 모양새, 혹은 형상은 '개체', 고유명사의 자유(자율성)를 끝내 얻지 못한 채 관계 안에서 무너지는 인간적인 상처와 슬픔을 닮아 있다. 상처와 슬픔은 삶을 공포로 번역하곤 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무능, 관계의 절대성에 대한 예의를 정당화한다. 나는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자연 가까이에 서서, 내가 하나의 춤, 노래, 제스쳐(짓)일 뿐이라는, 넘어가는 존재라는 침묵을 들으려 한다. 나는 자연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자연을 숨긴 채 자연을 표상하는 기표들, 인간적 상징들 중 가급적 덜 낡은, 덜 오염된 것들을 통해 그것의 침묵을, 제스쳐를, 존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는, 아니 자연 역시 이미 문화로 바뀐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겸허이고 안간힘이다. 자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자연'이며, 거기서 어떤 어긋남, 비틀림, 접합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도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연'이 가리키는 자연은 '자연'에 포획되지도 부합하지도 않는 그것이다. 나는 손가락이 가리킨다는 달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눈은 손가락을 향할 뿐 달까지는 보지 못한다. ‘있음’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방향, 지향성, 여기서 거기까지의 거리, 그러므로 욕망의 기표이다. 볼 수 없는 달의 있음은 없음으로서만 형상화될 것이다. 있음은 없음이고 없음은 있음이다.

 

 

Idleness_488.5x103cm_닥_2011

 

 

양태모 작가의 작업실은 그가 전국의 여기저기를 직접 돌아다니며 얻고 사고 옮겨온 나무들, 식물들, 암석들로 이루어진 정원을 지나야 나온다. 그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 근교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당히 너른 개인 정원을 만들었다. 단독주택이나 양옥에 비치된 정원은 우리네 삶이 그렇듯이 표준적이다. 중앙은 잔디밭이 차지하고 비육우나 양계 닭처럼 조경사들이 사육한 나무들, 꽃보다 더 화사한 꽃들이 변두리에 배치된다. 돌은 산에서 대량으로 캐내 다듬고 모양을 낸 상품이다. 작가의 정원은 그 상투형에서 좀 떨어져 있다. 그의 '눈'에 띤 독특하게 휘어져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눕는지 알 수 없는 나무들, '제멋대로 생겨먹은'(자연스러운?!) 화산석, 화분이라고 불리지만 비바람에 노출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화분에서는 야생초나 야생화들이 별 차림새 없이 자라고 있었다. 그의 정원은 그의 방식으로 인위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옮겨온 자연의 자연스러움, 저마다의 개성과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일부러 꾸민다기보다는 '저절로' 생겨나고 자라나는 과정을 지키는 중이었다.

물론 양태모 작가는 만드는 자(maker)의 위치를 떠나지 않는다. '무위자연'을 읊조리는 작가의 정원은 그렇다고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한, 자라는 것들을 모두 인정하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아닌정원은 아니었다. 그의 정원은 잡초가 없었고, 질서가 있었고 작가적인 컴포지션이 들어가 있었다. 즉 대단히 의도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의 '자연', 그의 작가적 태도를 사로잡은 '무위(無爲)'의 특수성을 포착해야 했다. 더욱이 그의 작업실과 정원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쓰레기장에서 직접 사들인 산업폐기물이었다. 배수로용 관으로 사용되다가 부피를 줄이려고 압축된 시커먼 산업쓰레기들이 온갖 기이한 모양으로 한데 모여 있었다. 그것들은 현실 속 어느 것도 닮지 않은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쓰임새'를 벗어남으로써 개체성을 획득한 것들이었다. 작가는 또한 망망대해에서 인간적 표식으로 사용되는 부표 역시 고향 바닷가에서 주워와 작업에 소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애써 '촌놈'이라고 지칭하는, 어릴 적 왠지 쓸쓸하고 외로울 때 자신을 위로해준 것은 집근처 산이나 들판 혹은 들꽃이었다고 말하는, 예의를 중시하고 '진심'을 전달하는데 골몰하는 남성 작가의 자연, 무위의 '개성'(유위)을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그의 '정원'을 먼저 분석했다. 작업실이라는 비일상적인 공간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사물'을 창조하는 예외적 개인인 예술가는 물론 근대의 산물이다. 예술가는 원본으로서의 자연을 모방하는 전근대적 단계에서 벗어나 내적 자연의 표현이나 ‘다른’ 자연의 창조로 옮겨왔다. ‘예술가는 자연에 내재한 질서나 규칙과는 다른 질서와 규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는 근대적 예술가의 이념은 인공적인 낙원으로서의 도시 거주자의 특성을 설명하는 문화적인 구성물이었다. 지금껏 서양화가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작업을 해온 양태모 작가는 무위자연이라는 '동양적' 관념에 천착하면서 자신만의 방향을 설정해왔다. 그는 쪼개고 분석한 뒤 종합하는 서구적 사유와 달리 직관과 통찰에 익숙한 '동양적인' 사유를 반영한, 가령 전통산수화의 이념을 자기화하고 있다. 그의 서구적 매체와 방법은 그의 동양적 관념과 맞물리면서 혹은 어긋나면서 조금씩 변형되어 왔다. 그는 텅 '빈' 캔버스에 형상을 채우고 그 형상으로 작가 개인의 개성이나 독창성을 증명하는 '작가'의 태도를 지우고 있다. 그는 캔버스 대신에 직접 자신이 짠 나무판을 사용하고, 붓질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평면과 평면을 채우는 오브제라는 회화의 형식은 견지한다. 2009년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자신이 직접 짜고 마감질을 한 나무판에 야생화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 꽃을 그렸다. 그의 식물이나 꽃은 아이러니하지만 그 누구의 그것들보다 훨씬 더 약하고 부드럽고 가냘프다. 그는 묵직한 나무판을 직접 짤 만큼 강한 체력과 힘을 소지한 남성(macho!)이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고 빈 ‘몸’이 남는 과정을 반복하는 식물들의 차이와 다양성을 펼쳐 보이고, 동시에 순간 - 정지 혹은 '상태'로서의 - 을 포착하려는 전략을 위해 작가는 견고하고 단일한 토대를 무대로 설정한다. 그는 자신의 (남성적)힘을 배경으로 푸르고 무른 삶을 더 작고 더 약하고 더 부드럽게 재현한다. 아니 바탕의 견고함 때문에 식물들의 연약함, 사소함, 안간힘은 더욱 강조된다. 접사렌즈로 찍은 듯, 아니 연인들이 함께 있을 때 그렇듯이 오래오래 바라보고 쓰다듬은 자의 몸에 각인된 연인의 몸처럼 그의 식물들, 꽃들은 섬세하고 '끔찍하게' 정밀하다. 그는 전부를 본 자의 신중함과 절실함으로 스러져가는 삶, 필멸(必滅)의 삶을 '재현'한다.

 

 

Idleness_233x233cm_닥_2011

 

 

그런데 그의 꽃과 식물들은 클로즈업 기법이 대상을 파편(fragment)으로 해체하듯이 잘려진 채 바탕에 분산되어 있다. 뿌리 없이 떠도는 식물이나 꽃은 일견 불안함을 발산한다. 같은 철에 피는 식물들도 아니다. 화면은 꽃, 씨앗, 열매의 병치를 통해 4계절을 품고 있다. 식물의 부박함을 보호하고 끌어안는 것은 '우드 캔버스'이다. 필멸의 삶을 불멸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캔버스'라는 심미적 형식과 세월의 변화를 견디는 나무(자연)의 물질성이 겹쳐지고 그 위에 삶의 찬란함과 동시에 덧없음의 은유로서의 식물이 얹혀짐으로써 삶의 전체를 바라보려는 작가의 강박증적 집착은 극대화된다. 그는 식물의 자연적 삶을 분절하는 계절을 제거하고 파편화된 상태로 식물을 뿌려놓음으로써 화면의 '자연스러움'을 최소화했다. 작가의 '관념'이 '자연'을 압도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꿈 장면처럼 파편화되어 있고 탈중심화되어 있다 - 무의식적인 장면은 나름의 질서를 갖지만 그것은 의식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적 인식이나 자연스러운 생명의 논리가 제거된 화면에서 드러나는 것은 필멸의 사실 앞에서 불멸의 가능성과 존재를 모색해온 '위대한' 인간들의 '사유'이다. 전체에서 잘려진 생명은 살아 있는가, 이미 부패의 냄새를 풍기는 사체인가, 캔버스에 놓인 유한성은 이미 불멸의 차원으로 옮겨진 것인가.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애정과 겨우 존재하는 것들을 다루는 태도의 무심함 사이에서 화면의 긴장이나 에너지는 증폭한다. 더구나 나무판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의도적으로 힘을 주어 파낸 화면에는 힘/폭력이 첨가된다. 필멸(必滅)의 삶의 은유로서의 식물에 불멸의 차원을 깔아주고 싶은 작가의 욕망은 잘린 식물과 '너머'를 포함하며 개방된 바탕, 상처난 몸으로 인해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다. 유한성으로서의 시간성을 캔버스라는 영원성에 붙잡아두려는 욕망은 영원의 은유로서의 나무판 자체에 내포된 결함으로 인해 좌초된다. 그는 영원한 삶(작품)의 불가능함을 실토하려는 것일까. 예술이 죽음을 내포하는 방법일까. 아니 그것은 보고 만져서 알 수 있는 세계, 그런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서의 영원함이라는 이분법 마저도 의심하는 자의 성찰일까? 그는 왜 자신의 견고한 평면에 구멍을 뚫음으로써 보이는 세계 너머의 세계, 봄의 가능성이 무력화되는 세계에의 욕망, 그 세계로의 추이(passage) 마저 불러들이는 것일까. 나무판은 필멸의 세계를 끌어안고 긍정하려는 작가의 시도이면서 동시에 그런 시도의 실패를 가시화함으로써 나르시시즘의 매혹 앞에서,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 앞에서 기어이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작가의 '비극적인' 태도를 증명한다. 그는 '자기'의 경계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자기해체를 시도한다. 그는 '인간'을 넘어서고자 한다. 구멍, 틈은 인간적 이해의 불완전함을 혹은 세계에 대한 소유와 화해의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구멍은 비밀, 누설, 엿보기, 보아서는 안 될 것, 결국 보고야 마는 것, 보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맹점을 포괄한다. 구멍은 볼 수 없는 대상 혹은 진실 - 있으나 없는, 없으니 있는 - 과 연관된다. 구멍은 (끔찍한) 진실이 너머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알리바이이지만, 구멍에 눈을 댄 자는 눈을 잃음으로써 진실의 존재를 증명한다. 구멍은 닫힌 전체로서의 이곳의 안정성을 전복시킨다. 구멍은 불가능한 욕망, 죽음의 위협/위험에도 불구하고 '너머'로 탈주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나는 그의 전작에서 화면에 분산된 꽃들을 보는 눈은 지나쳤을 이상한 모양의 여러 구멍들을 주목했다.

··········

이번 전시에서 꽃과 식물 이미지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에 지난번 전시에서는 꽃과 식물 옆에 사소하게 첨가되어 있던 아주 작은 원형들과 나무판에 덧대어져 있던 검은 판을 구성한 닥나무 섬유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했다. 그는 그리기,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의 재현을 위한 작가적 제스쳐를 대부분 제거했다. 역시나 유위(有爲)에서 무위로 가는 중이다. 가시적 이미지에 색을 입히는 회화적 관습을 대신하는 것은 회화에 대한 개념적 사유와 질문이다. 캔버스로서의 나무 판 위에 식물의 환원된 속성으로서의 섬유질이 오브제로서, 재현 이미지로서 첨가된다. 한국의 전지역에 자생하는 닥나무 껍질 속 섬유는 전통적인 한옥의 창호지를 만드는 원료였고 오늘날에는 한지의 원료로 사용되고 있다. 작가는 어린시절 동네에서 쉽게 보았던 나무가 닥나무이고 그것이 창호지의 원료라는 것을 떠올린 뒤 닥나무 섬유를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게 되었다고 했다. 딱딱한 나무에 들어있던 섬유는 여러 번의 인위적 작용을 통해 끈적끈적한 점성을 풀어내면서 물렁물렁해진다. 작가는 닥나무 섬유를 나무판에 붙이고 말린 뒤 그 위에 색을 입힌다.

 

 

Idleness_256x50x40cm_에나멜 도료_2011

 

 

금번 전시에서는 전작의 이름부르기, 시각적 차이를 통해 구체성을 드러내는 식물 알아보기와 같은 재현의 쾌락, 사소한 것의 의미에 대한 예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전면을 지배하는 무차별적인 무명(無名)의 존재는 침묵과 무의미에 대한 예의를 '강요'한다. 그는 이름과 기표에 근거해 조직/조작된 자연과 연관된 모든 것을 제거한다. 그는 이미지에서 실체로, 언어에서 사물로, 방편에서 물자체로 넘어가는 위험한 시도를 줄곧 견지했다. 그는 사소한 디테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강박증자의 태도와 시선으로 꽃과 식물을 재현했고, 이제 그의 강박증은 식물의 외피, 이름의 외피 안 '그것'을 재현하려고 한다. 완충지대, 중간, 역(驛)이 제거되면 보려는 욕망에 붙들린 인간의 보기는 불가능해진다. 시각적 이해와 앎 혹은 지배를 가능케하는 거리를 포기한 자의 봄의 장면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트라우마는 보기의 행위가 붕괴되는 장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너무 가까이 간 자, 아니 볼 수 없는 것을 본 자는 대상에 압도당하고 결국 주체의 지위에서 밀려난다. 주체의 소멸, 붕괴, 몰락, 혹은 죽음 그리고 그 대신에 전체로서의 풍경의 공포와 폭력이 주체의 지위를 갖는 풍경 혹은 장면. 인간이 사라지는 거기.

닥나무에서 비본래적인 것을 제거함으로써 남는 '본질'로서의 닥섬유는 알아볼 수 있는 재현의 장 내부 시각적 기표의 지위를 거의 제거한 닥나무이다. 즉 나무의 이미지(가시성)와 섬유로 환원된 사물(비가시성)의 거리를 드러낸 장면에서, 즉 작가가 '재현'한 닥나무에서 우리는 닥나무를 볼 수 없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것과 닥나무란 이름 - 작가는 자신의 오브제를 '닥나무'라고 부른다 - 은 합치되지 않는다. 표백되어 하얗게 된 섬유로서의 닥나무 - 없음 - 는 색으로서의 '외피'를 첨가함으로써 자신의 이름 - 있음 - 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작가가 그런 환원과 복귀, 제거와 첨가의 과정을 통해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거의 사라짐과 간신히 나타남 사이에서 어떤 불안, 긴장, 에너지, 힘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일까.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기표화할 수 없는, 사이를 드러낼 뿐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나무판 위의 '형상' - 앵포르멜(informel)한 - 은 말'더듬이'에 불과한 우리의 무능을 뒤로하고, 이제 자신의 견고한 나무판의 경계 너머 '밖'으로 삐져나간다.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는 너와 나의 차이, 나의 나르시시즘의 견고함을 증명하는 환상이다. 경계를 벗어나 저쪽으로 넘어간, 너에게 침입한 사물은 바라보기의 즐거움을 전복시킨다. 침입은 경계가 환상임을 알리는, 내부가 외부로 외부가 내부로 뒤집혀지는 공포를 가시화한다. 내부에 스스로 뚫은 구멍으로 '너머'를 암시하거나, 바깥으로 삐져나간 형상의 잉여로 경계 안 나르시시즘의 자기운동을 포기하는 작가의 욕망은 위험과 불안을 환대하려는, 아니 자기화해에 이름으로써 사물을 살해하는 희극에 이르지 않으려는,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비극적' 상황, 기어이 삶에 죽음을 묶은 채 삶을 끌고가려는 기이한 패배의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무위자연을 실현하려는 작가의 자연은 '자연'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혹은 '자연'의 내부로 밀려드는 그저 움직이고 있을 뿐인 자연이다. 그는 인간이 없는 어떤 세계를 향해 계속 '가는' 중이다. 작업실에서 작업이 끝나면 작가는 자신의 '완성된' 작품을 실외로 옮겨 비, 바람, 햇볕에 장시간 노출시킨다. 그의 정원의 사물들 - 바위와 돌까지 포함한 - 이 변화, 성장하듯이 그는 자신의 '작품'도 변화·성장의 과정에 노출시켜 인간적인 '완성'의 제스쳐 마저 제거한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실은 그의 자연의 일부일 뿐 독립적이지 않다. 차단된 밀실에서 작가의 사유와 내면의 상태를 번역하는 작업은 작가의 고유함을 통해 개성을 획득하고 그것을 통해 '인공성'을 정당화하려는 근대적 예술의 존재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양태모 작가는 개성의 흔적을 최소화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대신에 그것이 저의 삶을 저 흐름, 대기, 에너지의 장에서 지속하도록 틈을 열어 제친다. 사물에 대한 인간적 번역의 행위는 작품의 사물로의 변형의 행위로 대체된다. 전시장에 도착하기 전 작품은 무위의 시간을 입는다, 산다.

 

 

Idleness_120x40x118cm_에나멜 도료_2011

 

 

다시 산업폐기물이나 플라스틱 부표로 돌아가자. 그는 그가 발견했거나 주워온 일상의 물건들의 외적 형상은 조작변형수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레디메이드로서 전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거기에 색을 입히거나 닥나무 섬유를 입힌다. '입힌다'는 제스쳐는 벌거벗었다, 허기지다, 쓸쓸하다, 약하다, 보잘것없다, 외롭다에 대한 반응이다. 그의 입히기는 인간적인 세계에서 버려지는 인공품의 '무의미'에 대한 반응이다. 버려진 것, 추한 것, 쓸모없는 것이 난무하는 인간적 사회는 하나의 개체가 부분이면서 전체인 자연, 기와 흐름으로서의 자연, 이름을 버림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세계와 전혀 무관한 곳이다. 파편들, 상품들, 잘리고 떠도는 것들을 작가는  심미화한다(aestheticize). 미화(embellish)가 아니라 심미화이다. 그것은 문명사회에서 탄생한 '예술'이 쓸모없는 삶에 대해 바친 종교적 예의 같은 것이고, 인간적 질서가 숨겨둔 무의미의 진실을 반복하려는 전략이기도 하다. 드러내기와 감추기, 폭로와 보호가 교차한다. 사소하고 무의미하며, 심지어 신도 깃들길 포기한 문명의 사물을 그는 자신의 '제스쳐'를 통해 구제하려고 한다. 그의 작업실은 존재의 질서를 재접합하고 재배치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증명하려는 실천의 장소이다. 그는 나무판 위의 검고 칙칙한 '물건'인 닥나무와 닥섬유가 입혀진 공업쓰레기가 같다고 말한다. 나무판 위에 '누워' 있는 닥나무와 닥나무의 속성을 입고 조각처럼 '서' 있는 - 배수관은 '누워' 있었다 - 산업제품의 지위는 그의 '제스쳐' 안에서 등치된다. 시각성을 제거한 자연과 기능을 잃은 문명이 그의 시선 아래에서 동일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의 무차별적인 자연, 무위자연의 범주 안에서는 '제품'도 관계를 얻으며 춤을 춘다. 그는 만드는 사람이고, '사이'에서, 감히 삶과 죽음이 겹치는 장소에서 모든 것을 보려고 여행 중인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녕 자연에 이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관념, 개성에 갇힌 채 세계의 비밀을 발굴하려는 기이한 운명의 싸움을 계속할 뿐이다. 나는 그의 실패를 확신한다. 도대체 실패가 아니라면 도대체 그것을 무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의 '유위', 혹은 예술은 '무위'(의 환상)를 겨냥한다. 불가능한 욕망에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자의 광기는 공포와 두려움, 매혹, 혹은 연민을 자아낸다. 이미 삶이 '무(無)'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결국 질 것이고 죽을 것이라는 직관에 근거하여 삶을 냉소하는 이들은 가담하지 않는 내기이다. 나는 그의 고통, 그러므로 에너지 혹은 폭력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설령 그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준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들을 '귀'는 없다. 나의 '무지', 나의 무능은 그의 '고통'을 정당화하느라 피로할 뿐이다. 이 무익한, 쓸모없는 말과 문장과 생각들! 작가의 고통 - 힘으로 읽히길! - 의 크기, 그 고통이 추게 하는 춤, 그것이 계속 자기긍정과 부정의 방식으로 다가가고 멀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 그의 '환원'이 어디까지 가고 있을지 알 수 없기에 두렵다는 것. 나는 결국 '인간'에 대해 예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이름, 말이 아니었다면 저 춤은 누구도 출 수 없었을 것이니!

 

 

 
 

■ 양태모 (Yang, Tae-Mo)

 

단국대학교 회화과 동대학원 미술교육졸업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 단국대학교 조형대학원 박사수료

 

개인전  | 17회 | 2011 16회 금호미술관 (서울) | 2009 15회 금호 미술관 (서울) | 2008 14회 라메르 (서울) | 2007 13회 hun 갤러리 (뉴욕) | 2006 12회 베아트(평택)기획초대 | 2005-2006 11회 볼프스부르그(독일)기획초대 | 아트페어 : 6회 취리히 등

 

단체전  | 1990-2011 각종 국, 내외전 120여회 (서울, 뉴욕,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

 

수상  | 1990-2011 |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4회 | 한·일미술대전 최우수상 | 소사벌미술대전 최우수상, 특선3회 | 충남미술대전 특선2회 | 미술세계대상전 특선2회 | 21세기미술 “비평가상” 등

 

교육경력  | -1997,- 2007 단국대학교 서양화, 대학원 출강

 

작품소장  | 사라이바갤러리(프랑스) | 유라시아(독일) | 아라리오 화랑 | 단성갤러리 | 카이스트 연구소 | LG연구소

 

현재  | 동일공업고등학교 미술교사 | 한국미술협회회원 | 현대미술회원 | 유라시아

 

 
 

vol.20111117-양태모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