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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 사진 展
[바다, 저 편에서]
바다#05_80x80cm_Digital Pigment Print_2009.08
갤러리 나우
2011. 11. 16(수) ▶ 2011. 11. 22(화) Opening : 2011. 11. 16(수) PM 5: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92-13 3F | 02-725-2930
바다#11_65x65cm_Digital Pigment Print_2010.01
[평 론] 바다,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 인간은 왜 아무 의미도 없는 한 장의 그림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투영시키고 아무리 하찮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내는가? 이러한 물음의 가장 분명한 답으로서 우리는 예술적 행위 자체에 내재된 공명(共鳴)을 들 수 있다. 원래 공명은 어원적으로 소리의 물리적인 울림을 말하는데 우리가 현악기의 현(弦)을 울릴 때 그것을 듣고 있는 청중에게 전달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소리의 공명이다. 다만 이 공명들이 만드는 공통된 음역을 음계라고 하고 또한 이 음계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진행하는 것을 가락이라고 할 뿐이다. 그런데 소리가 아니라 인간이 경험하는 대상과의 관계에서도 공명이 발생하는데 이 공명은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지극히 주관적인(혹은 경험적인) 내적 의미의 연관(聯關)을 가진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연관으로부터 수렴된 공통된 연관을 외적 의미의 연관이라고 한다. 이때 우리의 유한한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외적 의미의 연관을 사변적인 영역에서 색(色)이라고 할 때, 반대로 인지할 수 없는 거대한 공명의 세계 전체를 공(空)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색은 원래 공으로부터 온 것이며 공은 끝없이 색을 잉태하고 소멸시키는 내적배경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예술은 근본적으로 소리의 공명과 같이 발생적인 창발(創發)에서 생성된다. 다시말해 대상과의 내적 공명은 더 이상 의미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정신적 혼(魂)을 말하는데 그것이 삶의 일부로서 발현할 때 우리는 종교라고 하고 개인의 표현으로 드러날 때 예술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술적 행위와 종교의 의식은 사실상 같은 기원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종교의 성스러움을 언어로 말할 수 없듯이 예술 역시 개념적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 작품에서 솟아오르는 이 새로운 창발이 바로 작품의 메시지가 되며 이럴 경우 작가는 세속의 신(神)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누설자가 된다.
바다#13_80x80cm_Digital Pigment Print_2009.02
그런데 공의 세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의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달인의 놀라운 솜씨, 눈 먼 장님이 길을 찾아가는 초감각, 작가들이 경험하는 행위의 충동과 희열 등은 결코 멀리 있는 신비의 순간들이 아니다. 다만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다를 뿐이다. 공의 세계는 물체의 겉모습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혼동과 혼란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감각적 경험을 통하면 비어있는 공(空)이 아니라 충만(充滿)이 된다. 그것은 어둠이 새벽 여명에 끝없이 만물을 잉태하고 빛의 만물은 끝없이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결국 모든 예술적 행위는 그 행위가 무엇이든 공의 세계에 관계한다. 그래서 화가가 그리는 그림이나 도공이 만드는 그릇은 결코 종이나 진흙 그 자체의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 그 너머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 그것 또한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도공이 사발을 만드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삶의 공명이 전이되는 매개물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뜻 있음직한 알맹이를 드러내기 위해 양파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는 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는 오로지 색의 세계만 보일 뿐 공의 세계는 감각적으로 아무 가치 없는 의미의 빈상자로만 나타나고, 거기에 내재된 공명의 실체는 결코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지시되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사진적 행위(acte photographique)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암시하는 가장 분명한 행위가 되며 또한 이러한 결과로 출현하는 사진은 정확히 지표(index)의 신호를 가진다. 여기 작가 이종만의 바다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사진적 행위의 지표로서 또 다른 감각의 세계를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의 유한한 감각의 눈에 사진들은 자극을 주는 그 어떤 인상도 특이함도 없이 오로지 바다라는 구체적인 테마와 함께 지리적인 장소의 확인으로만 나타난다. 게다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밋밋한 모노크롬과 단조로운 화면구성은 단숨에 전통 수묵화를 상기시키면서 풍경의 심미적인 탐구나 자연의 생태계나 환경보호를 암시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촬영 의도는 다른 데 있다. 왜냐하면 사진은 근본적으로 장면이 암시하는 해석학적인 장소가 아니라 그것을 만든 촬영자 자신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바다 사진들은 우선 단순한 지리학적 장소의 진술을 넘어 진술 불가능한 존재의 현실을 지시하는 일종의 사진적 추상이 된다. 사진들은 결코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거나 세련된 기교를 과시하는 사진이 아니다. 작가에게 바다는 더 이상 지리적인 장소로서의 바다가 아니라 오히려 연속으로 펼쳐지는 기억의 파노라마로 이해되고, 장면은 지리적인 장소와 그것이 암시하는 상황적인 인상(impression)이 겹쳐진 일종의 표현적인 대위법으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장님이 지팡이로 집을 찾아 가듯이 자신이 경험한 알 수 없는 기억의 절개 면을 따라가는 보이지 않는 삶의 작은 울림들이다.
바다#16_65x65cm_Digital Pigment Print_2009.02
이럴 경우 이미지는 정확히 심리학적 의미로 억압된 욕구나 충동을 위장시키는 이전(移轉)으로 이해되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빈 그릇의 지표가 된다. 달리 말해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삶의 애착과 희열을 사진 행위 그 자체로 은밀히 위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단조로운 모노크롬의 바다는 사실상 응시자에게 이미지를 읽는 시선의 개종을 요구하면서 감각의 이중적인 논리를 주파하고 있다. 그러나 평생 바다와 함께 살아 온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는 결코 자신의 경험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긴 인생의 여정에서 사진 행위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점진적으로 작품에 은밀히 침투하는 일종의 "무의식적 시선(vision inconsciente)"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진들은 전혀 출구가 없는 정방형 파인더에 의해 잘려져 응시자를 불안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또한 과도하고 비정상적인 톤으로 인해 바다와 하늘,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응시자를 동요시킴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극도로 정제되고 절제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텅빈 바다의 여백에 어렴풋이 드러나는 파도 너울과 바다양식, 부표, 그물 등 다소 분명한 구도로 출현하는 인간 노동의 흔적들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hic et nunc)을 호출하면서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갑자기 예견치 않은 기억을 솟구치게 한다. 게다가 예견치 못한 바다의 큰 구도가 화면 전체로 출현하자마자 갑자기 장소의 모든 확실성은 중단되고 이미지가 진술하는 공간은 수수께끼와 같은 표면에서 갑자기 보는 이의 “아무 공간”으로 방사된다. 아무 공간! 그것은 완벽히 이상한 공간임과 동시에 가능한 순수 자리로서 우리 모두 각자의 심연에 내재된 기억의 공간이 된다. 이러한 몽환적 발산(發散)은 엄밀히 말해 거대한 바다의 극히 분명하고 안정된 “부동(不動)의 진술”에 기인한다. 거기에는 오로지 공의 세계에 부유(浮遊)하는 지속 순간과 무시간의 연속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과 소실되는 현실을 격리시키는 사진의 순간 제스처에 너무 익숙해서 극도의 부동과 안정은 오히려 우리를 멍하게 하고 오싹하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상기시키면서 극도의 정수(靜修)로 바다를 사진으로 포착하는 것, 삶의 긴 굴곡을 지나면서 침전된 경험적인 것과 세상을 관조하는 눈으로 너울을 포획하는 것,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촬영자의 순수 체험에서 생성된 경험적인 독백임과 동시에 현실에 내재된 공명의 흔적으로서 작가 자신이 경험한 삶의 앙금들이다. 이 앙금들은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이루지 못한 종교적 희열,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아쉬움 그리고 곧 돌아갈 그 곳을 위해 아직도 방황하는 자신의 애틋한 갈망과 끝없는 욕구가 뒤섞인 지극히 진솔하고 개인적인 것들이다. 바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공명을 담고 끝없이 울리는 무언의 메아리이다. 이경률(사진 이론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교수
바다#20_80x80cm_Digital Pigment Print_20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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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만 Lee, Jong-man
1946 강원도 강릉 주문진 출생 | 1963 주문진 수산고등학교 졸업 | 1963-1976 수산업 협동조합 중앙회 근무 | 1976 사진작업 시작
개인전 | 2011 「바다, 저편에서」, 갤러리 나우, 서울 | 「바다, 저편에서」, 강릉문화예술관, 강릉 | 2008 「최근의 작업들」, 갤러리 PAST RAYS, 요코하마, 일본 | 2007 「섭리6」, 강릉문화예술관, 강릉 | 「섭리6」, 갤러리 瓦, 양평 | 2005 「섭리4.5」, 동해민예총전시관, 동해 | 2003 「섭리5」, 그린포토 갤러리, 서울 | 「섭리5」, 강릉문화예술관, 강릉 | 2001「오늘의 강릉」, 문화의 집, 강릉 | 1999 「섭리4」, 강릉문화예술관, 강릉 | 1996 「섭리3」, 이화미술관, 강릉 | 1991 「섭리2」, 예맥미술관, 강릉 | 1988 「풍경」, 예맥미술관, 강릉 | 「풍경」, 미놀타포토스페이스 초대전, 도쿄, 일본 | 1987 「풍경」, 서울 금강르느와르아트홀 개관기념초대전, 서울 | 1985 「누드」, 다랑 갤러리, 강릉 | 1984 「섭리1」, 다랑 갤러리, 강릉 | 1979 「바닷가의 24시」, 강릉문화원, 강릉 | 「바닷가의 24시」, 춘천시립문화관, 춘천
단체전 | 2010 「아시아 아트 페어날레」, 하슬라 미술관, 강릉 | 2002 「한국현대사진의 조망전」, 동강사진박물관, 영월 | 1994 「한국현대사진의 흐름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서울 | 1992 「강릉문화예술관 개관기념전」, 강릉 | 1986 「사진가 8인의 시각전」, 백상기념관, 서울 | 1985 「4인의 영상전」, 다랑 갤러리, 강릉 | 1984 「3인의 영상전」, 다랑 갤러리, 강릉 | 1981~1985 「강원도 미술초대전」
사진집 | 2007 『섭리』, 눈빛출판사 | 1986 『사람들』(동인집), 열화당
작품소장 | 예술의전당 5점 | 동강사진박물관 5점 | 강릉시청 1점
수상 | 2002 강원도 사진문화상 | 1986 강원사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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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11116-이종만 사진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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