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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현 展
숨겨진 이미지.질서의 발견: ‘사진찍기’에서 ‘사진하기’로
나-1_101x90cm_Ink-jet Print_2010
트렁크 갤러리
2011. 8. 10(수) ▶ 2011. 8. 31(수) Opening : 2011. 8. 10(수) PM 6:00 서울시 종로구 소격동 128-3 | 02-3210-1233
나-2_101x90cm_Ink-jet Print_2010
누군가의 첫 개인전에 나름의 방식으로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꽤나 흥분되고 설레는 일이다. 모든 ‘첫’이 품고 있는 긴장과 서툰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달콤한 열정과 도발의 충동을 대면하는 것은 권태로운 일상에서 드물게 마주치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서종현의 이번 개인전 역시 당사자에게나 옆에서 도움이 역할을 한 사람들에게나 어떤 의미 있는 사건을 예감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체적으로 그의 사진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선 언급할 것이 하나 있다. 서종현의 사진들은 ‘사진찍기’가 아니라 ‘사진하기’라는 보다 전면적이고 통합적인 행위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스스로 중ㆍ고등학교 시절 소위 ‘일탈적’ 행위의 달인이었으며, 현재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탈적’ 행위의 달인인 청소년들을 상담하는 것으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그는 군대 생활을 중단해야 할 정도의 강박증적 심리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찍으며, 찍힌 피사체를 다시 나누어 기하학적으로 재배치하며 반듯한 대칭(의 아름다움)을 고집하는 자신의 심리성향의 강도를 조절하는 법을 터득했다. 피사체를 발견하고 프레임에 담고 그 이미지를 다시 분할해서 보다 다층적인 공간을 구성하면서 그는 이미지의 대칭적 구도에 대한 강박이나 경직을 이미지 형태의 자가 증식으로 변형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렇듯 그의 사진들은 ‘사진하기’의 총체적 과정을 품고 있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단정한 대칭의 구도로 들어앉은 피사체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깊이에서부터 다중적으로 분할ㆍ재배치 혹은 재결합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도형을 거쳐 모호하면서도 아름다운 수수께끼 이미지들로 우리를 이끈다. 공간과 이미지에 대한 시각적 훈련에서 출발한 그의 사진찍기는 사진하기로 그 내포와 외연을 변경하고 넓히면서 사진-행위의 심미적 측면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결까지 끌어안는다.
다-2_74x82cm_Ink-jet Print_2005
서종현의 사진들은 전체적으로 공간을 지각하고 이미지를 발견하는 우리들의 익숙한 시각 뒤에 자리 잡은 낯선 시선에 대해 말한다. 이 낯선 시선은 기존의 시각체계가 학습시킨 지각방식과는 다른 길로, 다른 이미지와의 만남으로 우리를 이끈다. 서종현의 사진들이 어떤 ‘눈’에 의해 포착된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 어떤 ‘눈’은 서종현 개인의 눈도 아니고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눈도 아니다. 프로이트의 언어를 빌어 우리는 그것을 거의 본능 혹은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강박증적 동력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그 ‘강박증적ㆍ페티시즘적 보기’가 발견해서 ‘이미지’로 불러주기 이전에는 아직 이미지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퍼즐 이미지(picture puzzle), 혹은 수수께끼 이미지(Vexierbild)를 닮은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보는 방향이나 각도 또는 초점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중세 말 서구에서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고 특정 상황을 드러내거나 풍자하기 위해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곤 했다. 초현실적 현대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프란츠 카프카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숨겨진 이미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바로 그 이미지를 찾아내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뭔가 찾아낼 것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이미지는 결코 보이지 않는다. 카프카식으로 계속 말하자면 숨겨진 이미지를 발견해 드러내는 사람은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서종현의 임무는 무엇인가. 우리를 덮치는 무수한 이미지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또는 이미지와 무관해 보이는 범상한 일상적 삶의 우연한 국면에서 그는 절묘한 대칭적 질서를 보여주는 이미지를 발견해낸다. 이 이미지를 다시 자르거나 접합시켜 삼중, 사중의 대칭계열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우연적 발견에 몸을 맡기고, 그 다음에는 실험적 배치를 통해 필연적 발견을 추구한다. 이미지/질서의 아름다움 - 이것은 근대적 시각체계의 기본 원칙으로서 다른 근대적 강박 장치들의 혹은 통치 전략의 중요한 문화적 원리로 작동해 왔다. 근대적 시각체계는 질서와 무질서,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는 가장 오래된 ‘법'이(었)다. 이 법이 그러나 놓친 것들, 이 법 이면에, 혹은 틈새에 깃들어 둥지를 튼 이미지들. 서종현을 움직이는 저 ‘강박증적ㆍ페티시즘적 보기’는 바로 이러한 이미지들을 향해 움직인다. 이 사진들은 그 법의 까다로운 신경증적 감시체계가 추구하는 질서 뒤 혹은 아래에서 법이 구축한 것보다 더 정교하고 질서정연한 이미지-질서를 찾아냄으로써 법의 자기 완결성 주장을 조롱하고 법의 무의식을 드러낸다.
라-1_56x45cm_Ink-jet Print_2010
통속적 또는 전문적 정신분석의 용어로 강박증이라 불리는 이러한 ‘보기의 충동’은 어쩌면 감시와 처벌, 구분과 나눔, 끼워 넣기와 버리기, 고가와 저가의 질서 속에서 각각의 이미지와 개별 인간의 눈 사이에 (또는 이 사람의 눈과 저 사람의 눈 사이에) 정작 있어야 할 교감을 마비시킨 시각체계의 강박증이 낳은 뮤턴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에 대한 임시방편적 저항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강박증적ㆍ페티시즘적 보기 충동에는 그리고 그 충동의 결과로 나온 이 이미지들에는 사회구조적 맥락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들은 카메라를 든 개인 서종현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그 맥락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해석으로, 그 맥락을 투영하는 일종의 수수께끼 이미지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지 세계에 일기 시작한 어떤 지진의 단초들을 감지한다. 날마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이미지들 속에서 ‘뭔가 꼭 봐야 할 것이 있는데 놓치고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지 않은가. 신체에 새겨진 ‘보기’의 원천들인 국민교육과 자본의 욕망과 문화 이데올로기 강박을 거슬러,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상품/자본논리가 가져온 맹목의 바닥을 치고 떠올라 숨은 이미지들과 조우하고자 시도하는 이 새로운 ‘보기’는 징후적이다. 서종현의 강박증적 보기가 어떤 숨은 그림들을 더 들춰낼지, 궁금하다. 그러나 더 궁금한 것은 이 강박증이 어떤 다른 힘으로 변신할 것인가, 이다. 큰 강박증을 작은 강박증으로 조롱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한계가 있지 않을까. 작은 강박증 역시 강박증이기 때문이다. 작은 강박증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특수 장치나 전략, 아니면 다른 힘으로의 전환을 위한 내파가 필요하다. 서종현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고 싶다,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그 뛰어난 강박증적 보기의 능력을, 사진하기의 전면적 행위성을 어떤 방식으로 내파시킬지.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이미지 비평가)
라-2_56x45cm_Ink-jet Print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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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10810-서종현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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