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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유산 展
Part 1 - 이혁, 고상한 통속 Part 2 - Joseph, THE KOMERICAN
이혁_카인과 아벨
갤러리 토포하우스
2011. 7. 27(수) ▶ 2011. 8. 9(화) Opening : 2011. 7. 27(수) PM 7: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84 | 02-734-7555
이혁_뱀의 유혹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불온한 유산’ 전시를 오는 7월 27일부터 8월 9일까지 연다. 사진작가 이혁과 Joseph Lee는 이번 전시 <불온한 유산>전을 통해 한국에서는 조금 낯선 느낌의 예술사진의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하고자 한다. 사진작가 이혁은 2001년 일본 젊은 사진가상 수상, 일본 기요사토 뮤지엄에서 4점의 작품을 소장하며 사진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 후, 사실상 우린 이혁이라는 작가를 자주 만날 길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이런 공백기가 작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 예술계의 공식(?)이지만 그가 계속해서 작업을 구상하고, 꾸준히 노력하여왔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에 선보일 임펙트 강한 작업이 그것을 입증한다. 예술가가 하나의 예술품을 낳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과 노고가 따르는지 그는 작업을 통해 보여준다. 그야말로 art show인 이번 전시는 전시기간동안 인사동 토포하우스 건물 외관 전체를 선물 포장하듯 거대한 포장을 한다. 포장된 선물상자 안에 우리의 불온한 유산이 있다........
이혁_예루살렘
Part 1 고상한 통속展 (작가 - 이혁) ‘볼 수 있는’ 사진가로서 ‘볼 수 없는’ 자의 손끝이 느끼는 대상을 담아낸 사진작가 이혁의 ‘고상한 통속’ 전의 작업은 ’어두운 방(camera obscura)‘에서 빛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는 사진 일반의 특성처럼, 어둠의 세계에서 빛(점자)을 만나 새로운 세계를 획득하게 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지각능력에서 시각과 청각에 비해 더 구체적이고,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하는 촉각의 오브제인 점자성경작업은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이고, 구체적인 만남의 현상을 형상화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맹인은 점자책을 만나 빛의 세계로 인도되면서, 다시 ‘성서’라는 빛의 세계로 인도된다. 이 작업은 창세기 중 아담에 관련된 부분을 담고 있는데, 천지창조로 시작되는 창세기에서 빛의 의미는 간과될 수 없으며, 초점을 맞춘 부분은 빛에 의해 탄생한 아담이 다시 암흑의 늪으로 빠져드는 내용을 담고 있다.
Joseph_알리
Part 2, THE KOMERICAN 展 (작가 - Joseph) 얼굴, 이력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작가 Joseph은 수많은 인물과 장소섭외, 개인적인 사유의 주체성을 쫒기 위함이 시발점이었던 Komerican Project를 통해 각각의 인물이 주는 시선과 미국적 정체성을 눈여겨 보아왔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와 주체성을 표현하였다. 또한 각인물의 몸에 새겨진 문신의 야성성이 문명화되어있지 않은 몸과 문명화되어있는 인격을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 사유의 표현과 사회적 현상의 기록이라는 두 가지 의도를 사진이라는 도구로 담아냄으로써 오늘날 사회의 일회성 속에 점점 더 차가워지고, 고독해지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끊임없는 시각과 시간의 유동적 관계에서 오는 개인의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자 한다.
Joseph_인물
이혁 개인전 <고상한 통속>에 부쳐 古典과 pop의 불편한 랑데부 or 손끝으로 아담의 명암을 보다
점자(點字)성경을 찍었다. 점자성경은 보지 못하는 자가 손끝으로 보는 성경이다. 성경은 구원의 전도서로서 빛이 없는 곳에 빛을 던진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자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점자성경은 문자성경에 비해 성경의 본래적인 의미가 극대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사진작가 이혁은 점자성경을 매개로 하여 빛이 필요치 않은 성경에 빛을 던져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점자의 요철(凹凸)의 특성을 부각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암호처럼 제시한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시각장애자의 ‘손끝’만이 이 암호를 해독할 수 있지만, 점자가 사진의 평면으로 기호화되는 순간 시각장애자 자신도 해독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점자와 사진의 만남은 애초부터 의미의 접근이 불가능한 한낱 기호들의 유희로 전락하게 된다. 신성한 오브제에서 의미가 박탈되는 현상을 이혁의 작품들은 배경으로 삼고 있다. ‘사진으로 찍은 점자성경’은 ‘보이지만 읽을 수 없는 성경’이다. 작가 이혁은 이러한 기술상의 아이러니를 작품의 내용에까지 확장한다. 점자성경이 전체적인 바탕을 이루지만 각 작품 속에는 독특한 이미지 혹은 캐릭터가 함께하고 있다. 작가는 복사한 이미지 혹은 캐릭터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점자성경에 전사한 후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양자를 중첩시켜 소통시킨다. 그렇다면 이들 이미지 혹은 캐릭터는 점자성경의 내용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창세기 1장부터 8장까지의 내용 가운데 작가는 특히 천지창조 -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듦 -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음 - 카인의 아벨 살해 - 노아의 방주 - 인간의 한계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에 주목하는데, 이들 각각은 작가가 선택한 이미지 혹은 캐릭터와 만나면서 아이러니컬한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창세기 1장은 창조주가 암흑의 카오스를 빛의 코스모스, 즉 질서로 전환시키는 내용이지만, 그 위에 작가는 예루살렘 지도를 얹혀놓고 잉크의 농도를 조절하여 흩뜨림으로써 포탄으로 폐허가 된 도시이미지를 연출한다. 천지창조의 질서가 혼돈으로 화한 장면이다. 2장에서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는 대목에서도 얄궂은 사랑표시와 어슴프레 귀와 이마만 드러낸 미키마우스를 등장시킨다. 아담을 미키마우스로 희화화하고 있다. 3장의 선악과를 따먹는 대목에서도 컴퓨터 애플사의 애플 아이콘을 변형시켜 한 귀퉁이가 물어뜯긴 사과를 선보인다. 아담의 사과와 애플사의 사과가 멋쩍게 만나고 있다. 4장에서 아담과 이브 사이의 첫 아이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내용은 영화 매트릭스의 첫 장면처럼 기호가 검게 흘러내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붉게 흐르는 피를 배경으로 배트맨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5장에서 아담의 세 번째 아들 셋이 출생하는 장면에서는 푸른 배경에 다시 금빛의 미키마우스를 등장시켜 그 역시 우스꽝스런 인물로 묘사된다. 6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에서는 콜럼버스와 그의 배가 그려진 기념주화의 앞뒷면을 실어 성경의 선한 인물을 ‘주화’로 상징되는 ‘자본’의 노예에 빗댄다. 마지막으로 8장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와 이에 따른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다루고 있는데, 성스러운 황금빛이 전체를 압도하면서 아래쪽에 무언가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흔적을 희미하게 드러냄으로써 불안한 미래에 대해 위안의 여지를 남긴다. 오늘날 성경 내용에 충실하게 살고 있는 대표적인 국민은 역시 미국인을 꼽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의 상류층은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위대한 미국을 건설하는 데 힘썼지만 그 이면에는 우스꽝스럽고 통속적인 미국이 도사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에서 ‘미국은 미국 자체가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이혁이 이번 전시에서 차용한 캐릭터인 미키마우스, 애플, 매트릭스, 배트맨, 콜럼버스 주화 등은 ‘성경’이라는 성스러운 말씀과 만나면서 미국사회의 감춰진 이면을 들춰낸다. ‘성경’을 앞세우지만 현실에서 진행되는 희화적이고 배타적이며 음흉한 상업주의적 음모에 그는 절망한다. 그래서 이혁이 바라보는 성경은 어둡고 슬프다. 고상함을 가장한 통속 앞에서 그는 고뇌한다. 그러면서도 8장에 형상화된 흔적이 암시하듯이 클레의 후기작품 <아직도 더듬거리고 있는 천사>에서처럼 시력은 잃었지만 희망의 불씨를 찾아 세계를 향해 더듬거린다. 결국 작가 이혁에게서 오브제로서의 성경은 그 의미가 전복된다. 그리하여 점자성경의 시각화가 지닌 아이러니는 이제 성경의 성스러운 의미가 세속적으로 둔갑하면서 형식에서 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아이러니컬한 성격을 띠게 된다. 그런 한에서 이번 이혁의 전시는 성(聖)이 어떻게 속(俗)과 관련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의미상으로는 종교적 혹은 문화적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는 한편, 기술적으로는 점자의 시각화를 통하여 문자적 의미를 담지한 오브제를 새롭게 발굴하고, 사진사적으로는 전통(古典)과 현대(pop)의 불편한 랑데부를 형상화하는 쾌거를 이룬다. 텍스트해석가, 단국대 교수 유헌식
Joseph_이다_칼
조셉 리의 개인전 <The Komerican>에 부쳐 공허와 저항의 블랙 코미디
음울하다. 불길하다. 씁쓸하다. 어떤 건 야비하고 살벌하기도 하다. 조셉 리의 이번 전시작품을 접하는 순간 묘한 불쾌감과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 원인은 조형적으로 문신(文身)한 인물을 오브제로 설정한 데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이 인물들의 차갑고 삐딱한 시선에 있다. 그래서 작품의 감상 포인트는 이들의 눈빛에 서린 실존적 부조리를 읽어내는 일이다. 조셉 리의 이번 전시제목인 <The Komerican>을 염두에 둘 때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연관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komerican’이란 용어는 본래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을 뜻하지만 그는 이를 한국에 살면서 미국문화를 흉내내는 일군의 부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에둘러 사용한다. 이들의 미국적인 행태 가운데 특히 ‘문신’에 그는 주목한다. 한국과 같은 유교문화권에서 문신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에 상해를 가한다는 이유로 금기시하고 있어서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게 문신은 거부감을 준다. 그런데도 문신은 ‘채색된 피부장식’으로서 한국의 일부 젊은이들에게 유입되고 있다. 가까운 과거에서 볼 때 문신은 뱃사람이나 전쟁터의 군인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등 험한 일에 종사하는 이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여성의 경우 창부(娼婦)에게만 해당되는 불온한 형상이었다. 이렇게 험하고 천박한 문화의 소산이 특히 미국에서 한국으로 전파되면서 이제는 서서히 대중적인 기호로 자리잡고 있는 형국에 작가는 착안한다. 조셉 리의 작품 속 인물들은 거의 문신을 하고 있지만, 뱀을 목에 걸고 있는 여인과 칼을 입에 물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문신이 없다. 작품들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는 ‘여럿이 성조기를 꼽고 있는 사진’까지 고려할 때 작가에게 문신은 미국과 관련짓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모든 배경에는 천을 드리웠는데, 인물이 호랑이 무늬의 셔츠를 입거나 조선시대의 망건을 쓰는 등 한국적인 상징을 드러내는 경우가 아닐 때에는 배경에 호피무늬의 천을 드리워 ‘호랑이’로 상징되는 한국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성조기는 인물이 손에 들고 있는가 하면 뱃지로 달고 있기도 하고 땅에 꽂기도 하는 등 한국적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데에서 작가는 호랑이를 상징물로 한 문양을 표현하는 데 주력할 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데 반하여, 미국문화를 드러내는 데에서는 성조기를 비롯하여 담배 ‘american spirit’, 미국 신사모를 쓴 해골장식, 성조기 이미지를 본 딴 모자의 바지장식 그리고 펑크 복장 등 다양한 소품을 동원한다. 특히 문신의 경우 미국에서 유입된 ‘올드스쿨 타투’와 ‘트라이벌’ 등이 자주 눈에 띄고 ‘Bastard(불한당)’라는 레터링을 목 아래와 셔츠에 새기고 있는가 하면, ‘lucky’ 혹은 ‘good’이라는 레터링을 손가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품 가운데 유독 한 여성만이 손등에 문양이 아니라 글자 ‘求遠’을 새기고 있는데 이는 동음이의어인 ‘구원(救援)’을 성서적 의미와는 어긋나게 ‘멀리서 구한다’는 의미로 변형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작품들과 변별력을 가진 주목할 만한 작품은 <입에 칼을 물고 있는 여인>이다. 다이안 아버스(Diane Arbus)의 작품 가운데 ‘서커스의 한 여성단원이 천막 앞에서 팔을 벌린 채 머리를 젖혀 입에 칼을 물고 있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한복의 검은 상복(喪服)을 입은 여인이 목에 뱀을 감고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손에는 성조기를 거꾸로 든 채 머리를 젖혀 입에 칼을 물고 있다. 뱀은 이브를 꼬여 선악과를 따먹게 한 악의 상징으로서 칼과 호응하여 양손의 성서와 성조기에 대응한다. 작품들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는 조셉 리의 마지막 작품은, 작품 속 인물들이 모여 성조기를 땅에 꽂고 있는 장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조 로젠탈(Joe Rosenthal)의 유명한 사진 <이오 지마에 미국 국기를 꽂고 있는 해군들>(1945년 작)을 연상시킨다. 로젠탈의 사진은 미국인의 용기를 상징하여 지금까지 미국의 대표 이미지 가운데 하나로 차용되고 있는데, 이 장면을 조셉 리는 역설적인 의미로 바꾸어 재현한다.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그것도 한국인이 성조기를 어설픈 포즈로, 더구나 거꾸로 꽂고 있다. 결국 조셉 리의 이번 작품들에서는 한국적 이미지가 미국적 이미지와 충돌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우울하면서도 희극적인 양상이 그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전체적으로 한국인이 미국의 하층문화를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데 따른 일종의 블랙 코미디를 연출한다. 이러한 사정은 작품 속 인물들의 눈빛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우면서도 도발적이다. 문신을 통해 일상의 권태에서 벗어나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지만 전망이 어두워 맥이 빠진다. 저항과 공허가 동시에 밀려드는 심리적 공간에서 스스로 비웃는다. 파멸을 예견하면서도 불빛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의 운명을 자신에게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적인 심리상태를 조셉 리는 주도면밀한 사고와 섬세한 감성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문예비평가 유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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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10727-불온한 유산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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