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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 展
서울미술관
2011. 4. 4(월) ▶ 2011. 4. 10(일) Opening : 2011. 4. 6(수)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43 대일빌딩 B1 | T.02-732-3314
독도 Documentary +ism
언젠가부터 동산 이정재 화백의 마음속엔 독도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 있었다.
울릉도의 우산국이 신라에 귀속된 것은 6세기 초. 지금의 독도(獨島)다. 독도는 삼봉도(三峰島), 우산도(于山島), 가지도(可支島)라 명칭을 달리 하며 불리웠다. 현재 독도로 표기되는 이 섬은 ‘외로운 섬’, ‘홀로섬’이 아니라 ‘돌섬’이 ‘독섬’으로 발음되면서 독도로 표기되었다. 지금도 울릉도 주민들은 독도를 ‘독섬’‘ 혹은 ’돌섬‘으로 부른다. 우리가 ’외로운 섬‘이라 여겼던 그래서 동떨어져 있던 독도는 그 정확한 의미를 알고 나면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돌섬! 단단한 섬. 강인한 섬. 독도는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니라 이 작품전을 통해 단단한 섬으로 거듭나고 있는 느낌이다. 화백의 강한 터치와 색채가 끊임없이 그것을 설파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작업실에서만 붓을 들고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품 작품을 위해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귀 기울이고 끊임없이 고민하며 발로 뛰어가면서 작품의 소재를 얻고, 자연스레 민족의 역사와 뿌리에 관심을 기울인다. 금번 개인전의 주제인 ‘독도 Documentary +ism’에서 그의 고집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시각, 다양한 각도, 다양한 시선에서 출발하여 화폭에서 꿈틀거리는 기표들은 역사 속의 이야기와 독도를 두고 펼쳐지는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현재의 갈등 상황 즉, 통시적, 공시적 현상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그러한 그리움은 어느 때부턴가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던 독도가 일본의 망언에 우리민족은 분노하고 규탄대회를 가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나의 의식속에 더욱더 그 어떤 부름이 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작가로서 나는 이 문제를 지금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이에 어떻게 부응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물음에 나의 작가적 소명의식은 독도를 미적인 감각과 역사의식으로 미술이라는 매체를 통한 표현이며 독도의 미술문화운동이라는 결론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고백이다.
이정재 화백은 독도를 발로 디디며 이미지를 눈으로 확인하기에 앞서 가슴으로 안았다. 2008년 카메라를 들고 울릉도를 떠나 ‘수평선 위에 조용히 삼각형과 장방형의 기하학적인 모습으로 서있는 우리의 땅 독도! 동도와 서도’를 화가다운 시선으로 조우했다. 그리고 독도에 발을 디디며 흙과 돌, 검은 돌틈 사이의 풀잎과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를 어루만지며 독도의 원시성과 태초의 비밀을 듣는 듯 했노라고 고백한다. 독도에서 품었던 그리고 새겼던 오감의 감동은 그의 화폭에 다양한 개성으로 표현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2009년 이화백은 다시 독도를 찾았다. 캔버스와 이젤 등 화구를 한짐 짊어지고 섬에 들어가 독도를, 바다를, 하늘을, 하늘을 나는 갈매기를 화폭에 옮기며 ‘생명의 천국’을 보았노라‘ 말한다. 작가가 바라보는 시선엔 일관되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드러난다. 독도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은 작가의 감수성을 자극했고 이것은 고스란히 화폭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직접 몸으로 수집한 독도의 이미지는 수차례 작품전을 여는 원동력이 되었다.
Documentary전의 일관된 기의 즉, 함축의미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민족 의식’이다. 그의 작품을 대하고 있노라면 독도를 구성하고 있는 돌, 들풀 하나, 파도, 갈매기에 이르기까지 강함과 때로는 부드러움이 감상자를 이끄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강하고 질긴 생명력과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음에도 감상자를 편안하게 이끄는 비밀은 바로 색채에 도사리고 있다. 오행에 따른 우리 전통색의 기본은 五方色. 오방색은 말 그대로 풀면 다섯 가지 방향의 색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과 동서남북 다섯 방향을 기본으로 오방을 설정하고 이 방위에 따라 오색을 두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대부터 음양오행 사상에 근거한 색채 문화가 있다. 음양오행 사상은 음과 양의 기운이 생겨나 하늘과 땅이 되고, 다시 음양의 두 기운이 목 木,화 火, 토 土,금 金, 수 水의 오행을 생성하는 것을 말한다. 즉, 오방색에는 자연과, 역사, 인간의 정신이 내포되어 있다. 목(木)은 청(靑), 화(火)는 적(赤), 토(土)는 황(黃), 금(金)은 백(白), , 수(水)는 흑(黑)에 대응된다. 오방색 각자의 기표는 다음과 같은 기의를 담고 기호로 작용한다. 녹색은 생명과 창조, 적색은 기상과 꿈, 황색은 결실과 풍요, 흰색은 단결과 자존심을, 흑색은 인내와 불굴을 상징하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색채가 머금은 상징은 독도 Documentary+ism전에서 이 화백의 손끝을 거쳐 표현되고 있다. 돌섬의 근원적 생명의 원시성과, 바다의 풍요로움, 외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은 인내와 불굴의 정신은 과거에 갇히지 않고 미래를 바라보는 꿈과 고스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우리 땅에 대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마치 감상자에게 전염되듯 퍼져 나간다.
자연과 대화하고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소통하며 고민하고 예술가로서의 작업에 치열하게 몰입하면서 개인전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게다가 이 화백은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교수이다. 그의 감성과 작가적 성실성은 기독교적 가치관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독도가 갈등의 섬이 아니라 화합과 상생과 조화의 섬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 하다. 자연은 욕심내고 싸워서 쟁취하는 대상이 아니라 조물주의 섭리 안에서 인간은 겸허해야 하고, 인간에게 잠시 맡겨진 자연은 조물주를 대하듯 경외심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소극적인 무관심 또한 질책하는 힘을 발견한다. 학생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유를 들어 말씀을 전하듯 그는 그림을 가지고 감상자를 설득한다. 독도의 다면적 개성을 무수히 생산해내는 화가의 노고를 더듬어 가다보면, 그의 작품은 기록(Documentary)이 되고 그 의미를 되짚어 가다보면 그의 독도는 이야기가 되고 메시지가 된다. 그의 캔버스에 오롯이 서 있는 독도는 감상자 각자에게 각자의 관심만큼, 각자의 의식만큼, 각자의 참여만큼 의미작용할 터이다. 이것이 그림의 힘이고 문화의 힘이다. 강요하지 않되 많은 생각을 일깨우고, 상대를 노골적으로 비판하지 않으면서 수긍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東山 이정재 화백의 독도 Documentary+ism전은 독도가 더 이상 ‘외로운 섬’이 아닌 강인한 ’돌섬‘의 힘을 드러내는 전환점(turning point)이 되고 있다. 앞으로도 독도의 ’이야기‘를 널리널리 전염시키는 외롭지 않은 단단한 ’돌섬‘ 같은 작가로 우리 곁에 머물러주길 기대하는 바이다. 그의 독도에 대한 근원적인 그리움이 영원히 고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r
홍기현(독일 괴팅엔 대학교 철학박사)
어느 화가의 나라사랑 이야기
제가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림을 좋아하고, 실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사랑하는 하나님을 바탕으로 대학에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사람입니다. 저에게는 인생에서나 그림으로 모두 선배지만 동료처럼 대해주십니다. 저와는 그림으로 만나 꽤 오랫동안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부탁해 왔습니다. 아니! 글 잘 쓰는 사람이 도처에 널렸는데 나처럼 앎도 짧고 글재주도 없는 사람에게 글이라니. 저의 완강한 거절에도 그는 그 이상의 부탁을 하였습니다. 부탁을 받는 순간 저의 머릿속은 백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잠시 지나자 저는 그의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와 같이 지냈던 십 수 년의 시간은 나의 빈 머릿속을 화선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퍼져왔습니다.
저에게 그에 대한 첫 인상은 매우 열정적이다 는 것입니다. 그와 안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는 지방대학의 신생학과 초임교수였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주 서울에 올라와 지리 안내를 부탁하곤 하였습니다. 자연히 동석을 하게 되면서 그가 자주 상경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학과의 강의를 연구실에 앉아 지인들에게 위탁하는 일반적 관행에서 벗어나 그 과목의 적임자를 직접 찾아 다녔습니다. 그것도 그 분야에서 꽤 덕망 있는, 그가 처음 만나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유창한 말솜씨와 논리로 왜 강의를 맡아주셔야 하는지를 설득하였고 그 학과의 미래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말에 동의하였던 것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는 그랬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힘이 누구보다 대단한 그였습니다.
한동안 그를 만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전화도 안 되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은 충동에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지 부드럽게 따져 물었지요. 그에게서 나온 말은 저의 머리를 강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학의 교수인 그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도 아니고 세 개의 분야에서. 신학과 미술학과 철학. 저는 저의 귀를 의심하고 재차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고 보니 그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자랐지만 배움의 왕성한 욕구는 그의 주변 환경을 극복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뒤 안정된 생활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앎의 현장으로 내모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저에게도 계속적으로 그가 새로이 알게 된 분야에 대해 소개해 주는 배려를 잃지 않는 여유도 있는 그였습니다. 그는 그랬습니다. 배움에 목말라하고 끊임없이 학문의 현장에 서 있는 그였습니다.
우리는 같이 여행을 해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기억을 되돌려보니 저는 그와 같이 적지 않은 여행을 했습니다. 설악산과 강천산 등지로 같이 스케치도 다녔고 만주의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도 같이 갔고 북경, 아제르바이잔과 터키도 같이 갔었습니다. 여행 동안 그는 여행일정에 피곤한 동행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위해 여유 있는 농담과 힘든 일에 대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상식을 재치 있는 입담으로 소개해주었고, 영어를 통한 통역도 거침없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한 여행 중 잊을 수없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 곳은 다름 아닌 독도(獨島)였습니다. 3년 전쯤 가을 즈음에 그가 갑자기 독도를 가자하였습니다. 저도 평소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울릉도와 독도이어서 그를 따라나섰습니다. 그의 사전 안배로 저는 아주 편하게 다녀 올 수 있었습니다. 다녀온 뒤 그는 독도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독도의 소재 선택이 즉흥적인 일이 아닌 아주 오래 준비되어진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평소 그가 하는 말에 잘 녹아있습니다. 그는 학창시절에는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한 경력이 있다하였습니다. 그 뒤로도 사회에 나와 그가 속해있는 지역사회를 위한 다양한 문화운동을 벌인 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평택에 미군기지 이전을 반대하며 개최한 전시회도 그랬는데, 독도를 통한 문화운동도 그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그만의 애국의 표현이었습니다. 마치 일재 식민치하에서 민족을 생각하며 소를 그려온 이중섭화백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독도는 단순히 영토의 문제를 넘어선 우리의 완전한 주권 회복의 상징입니다. 김구선생님이 말씀하신 완전한 자주독립의 완성입니다. 그는 화가이기에 이러한 뜻을 그림에 담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독도를 다녀온 뒤에도 그는 혼자서 몇 번 더 독도를 다녀왔습니다. 백두산도 다녀왔습니다. DMZ도 돌아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한반도,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화폭에 옮겨 그가 생각하는 애국을 그림을 통한 문화운동으로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독도를 소재로 한 작품전도 몇 번에 걸쳐 열었습니다. 이번 전시도 그 연장에 있습니다. 그는 해외를 돌며 독도를 통한 국가와 민족의식을 새로이 정돈하고 이를 외국에 알리려는 원대한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그를 바라볼 것입니다. 그의 계획이 세계와의 소통과 평화를 향한 하나의 거멀못이 되는 그날을 기약해봅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저의 일천한 지식과 재주가 원인이지요. 그러기에 제가 그의 작품을 논하고 경중을 따지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가 저에게 글을 부탁한 이유에 대한 의문의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족한 능력으로 인해 현학의 글이나 과도한 미사여구를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맞춤법이나 맞기를 바랄 뿐이지요. 이것이 그가 저에게 글을 부탁한 이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소박함 속에서 묵묵히 자기의 일을 해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이정재입니다.
우상호(화가, 목원대학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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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재
현재 남서울대학교 애니메이션학과에 부교수로 있다. 한국에서 미술학사(B.F.A)와 목회학석사(M.Div)를 졸업했고 신학박사(Th.D)와 문학박사(D.Litt) 그리고 철학박사(Ph.D)를 수료했다. 미국에서 인문학석사(M.L.A)와 미술학석사(M.F.A)를 했으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강의조교(T.A)로 학부생을 지도했다. 국내외에서 개인전을 33번째를 했으며 단체전으로 200여회를 했다. 21C국제미술문화교류협회를 맡고 있으며 5번째 국제전을 개최했고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을 했고 각종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장 등 55회를 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독도를 사랑하며 문화로 독도 지키기 운동을 하고 있다. 2011년에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두 곳에서 독도 순회전과 강연을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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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10404-이정재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