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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명 展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 “실크로드와 둔황”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2010. 12. 18(토) ▶ 2011. 4. 3(일) 서울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 02-6273-4242
왕오천축국전, 중국 감숙성 둔황 막고굴_358x42cm_8세기
세계문명展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2010년 12월 18일(개막식은 12월 17일)부터 2011년 4월 3일까지 세계문명展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을 개최한다. 이 전시에서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往五天竺國傳)”을 비롯하여 중국 신쟝(新疆), 간쑤(甘肅), 닝샤(寧夏) 등 3개 성(省) 10여 개 박물관에서 청동마차상 등 실크로드 관련 유물 220여 점이 소개될 예정이다. 이 가운데 8세기 초에 쓰여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한국인이 작성한 최초의 해외 여행기로서, 세계 최고의 여행기 중 하나로 손꼽히며,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문화.경제.풍습 등을 알려주는 세계의 유일한 기록으로 그 가치가 높다. 727년 혜초에 의해 기록된 이후 한국인들에게 1,283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문명 교류의 젖줄로, 이번 전시에서는 초원의 길, 오아시스로, 바닷길 등 실크로드의 3대 간선도로 가운데 중앙아시아 일대 여러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를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이번 전시는 파미르 고원 동쪽으로 8세기 혜초가 여행하였던 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 크게 5부로 나뉜다. 1부는 도입부, 2부는 서역북로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카르, 쿠차, 카라샤르, 투르판 등이 소개된다. 이는 카슈카르에서 둔황에 이르는 서역북로와 서역남로 두 가지 길 가운데 혜초가 선택한 길이다. 3부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서역 남로에 있는 호탄, 니야, 누란 등의 오아시스 도시 및 서역북로, 천산북로 등 실크로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4부는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던 둔황의 석굴과 벽화 및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혜초의 여행을 설명한다. 5부는 둔황에서 서안에 이르는 길에 있는 난주 및 영하 지역의 유물이 소개된다.
황금대구, 중국 신장성 카라샤르_길이 9.8cm_1-2세기
전시 구성: 이 전시는 크게 5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실크로드의 개념과 지도를 소개한다. <2부> 카라샤르에서 출토된 황금대구(허리띠 잠금장치, 도1)는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7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용의 몸 여러 곳에 터키석을 상감하였다. 용의 형체는 모발처럼 매우 가는 황금실[金絲]를 용접해서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금 구슬을 가득 채워 장식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물(도2)이 발견되어 특히 흥미를 끈다. <3부> 2002년 누란 소하묘지(小河墓地, 도3)의 발견으로 이 지역에서 약 4,000년 전 유럽계의 인종이 밀 등을 재배하면서 이루었던 독자적인 문화를 소개한다. <4부> 중국 서쪽 영토의 끝이자, 서역이 시작하는 관문으로서 번영을 누린 둔황 막고굴의 유물 16점, 복제품 20점(벽화 17점 포함) 및 둔황 석굴 모형 2점(17호굴, 275호굴)이 국내 최초로 공개된다. 이 가운데 17호굴(도4)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5)』뿐 아니라 둔황문서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던 이른바 장경동(藏經洞)으로서 둔황학 성립과 관련하여 의의가 큰 곳이다. <5부> 둔황에서는 서쪽으로 난주를 거쳐 장안에 이르는 지역의 유물을 소개한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이 지역은 중국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성격의 문물이 생겨났다. 청동의장행렬(도6)은 중국적인 전통이지만, 매머리장식(도7)은 흉노 등 이 유목민 사이에 유행하였던 것이다. 감숙성 북쪽에 있는 영하(寧河)에서 발견된 동로마 금화(도8)은 이 지역에서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왕오천축국전” 및 최근 중국 실크로드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위주로 전시되는 세계문명展 “실크로드와 둔황”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전시되는 실크로드 관련 전시로서 해외 문명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을 넓혀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소하묘지 전경, 중국 신장성 누란_기원전 2000-1000년
“실크로드, 동서문명의 교차로” 실크로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문명 교류의 젖줄이었다. 1만여 년 전 비너스 상이 동서에 걸쳐 출토되었던 데에서 보이듯 역사시대 이전부터 인간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문명을 주고받아 왔다.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동서문명의 교류는 중앙아시아 일대 여러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Oasis Road), 유라시아대륙의 북방 초원지대를 지나는 초원의 길(Steppe road), 유라시아대륙 남쪽의 바다를 이용한 바닷길(Sea Road)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를 흔히 실크로드의 3대 간선도로라고 한다.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19세기말 독일의 지리학자 리흐트호펜(F. von Richtohfen)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그는 비단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이를 실크로드(비단길)라고 명명하였다. 이후 실크로드는 시리아, 로마로까지 점차 확장되었다. 이 길은 주로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오아시스로에 해당하며, 3대 간선도로 가운데서도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아시스로는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그리스에서 아프카니스탄에 이르는 파미르 고원 서쪽 지역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의 원정 이후 그 길이 크게 개척되었다. 카슈카르에서 장안에 이르는 파미르 고원 동쪽 지역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장건의 서역 개척으로 비로소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후 서쪽의 로마, 동쪽의 장안을 사이에 두고 비단뿐만 아니라, 유리, 도자기, 종이, 종교 등 각종 문물이 활발하게 상호 전래되었다. 이러한 문물의 이동은 장안을 거쳐 동쪽으로 신라의 경주에까지 전해졌다.
“혜초와 실크로드” 신라의 혜초는 8세기초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실크로드를 여행하였다. 인도의 성지 순례로 시작된 그의 실크로드 탐험은 서쪽으로 아프카니스탄을 거쳐 이란까지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장안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혜초는 그의 여정을 “왕오천축국전” (Wang o cheon chuk guk cheon, 영문 표기 확인 바람.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Wang wu tian zhu guo zhuan은 중국식 발음 표기임)에 기록함으로써 그가 경험했던 실크로드의 정경을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는 파미르 고원 동쪽으로 혜초가 여행하였던 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전시는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도입부, 2부는 서역북로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오아시스 도시인 카슈카르(kashgar), 쿠차(kucha), 카라샤르(karashar), 투르판(trufan) 등이 소개된다. 카슈카르에서 둔황에 이르는 서역북로와 서역남로 두 가지 길 가운데 혜초가 선택한 길이다. 3부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서역 남로에 있는 호탄(khotan), 니야(niya), 누란, 등의 오아시스 도시 및 서역북로, 천산부로 등 실크로드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4부는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던 둔황의 석굴과 벽화 및 “왕오천축국전”의 내용을 중심으로 혜초의 여행을 설명한다. 5부는 둔황에서 서안에 이르는 길에 있는 난주 및 영하 지역의 유물이 소개된다.
호굴(모형), 중국 감숙성 둔황 막고굴_높이 4.95mx가로 570cmx세로 895cm_9세기
“서역 북로의 오아시스” 천산산맥의 남쪽,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서역북로(천산남로)는 카슈카르, 쿠차, 카라샤르, 투르판 등의 도시가 연결되어 있는 길로, 혜초가 직접 지났던 길이기도 하다. 서역북로의 오아시스 길을 따라 곳곳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카라샤르(焉耆)에서 출토된 황금으로 만든 대구(帶鉤: 허리띠 잠금장치)는 당시 집권계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앞부분에 구멍이 뚫려있으며 허리띠를 잠그기 위한 고정 핀이 달려있다. 큰 용 한 마리와 작은 용 7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는 듯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으며, 용의 몸 여러 곳에 터키석을 상감 하였다. 용의 형체는 모발처럼 매우 가는 황금실(金絲)를 용접해서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금 구슬을 가득 채워 장식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물이 발견되어 특히 흥미를 끈다. 서역 북로의 도시 가운데 가장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가지고 있는 곳이 바로 투르판이다. 여름의 더위가 너무 높아 불의 도시 화주(火州)로 불리는 투르판에는 교하고성, 고창고성, 베제클리크 석굴, 아스타나 고분 등 많은 유적이 있다. 이중에서도 아스타나 고분은 3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모두 500여 기가 묻혀 있는 집단 무덤으로, 수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무덤주인생활도는 6장의 작은 그림을 붙여 만든 것으로, 무덤 주인의 생전 호화로운 생활이 죽은 후에도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림 중앙 장막 아래에 남자 주인이 둥근 부채를 손에 쥐고 평상 위에 앉아 있고, 시녀가 대기하고 있다. 우측 하단에는 부엌, 좌측 하단에는 말과 부리는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그림의 주제와 기법은 중국 하서(河西, 현재의 감숙성) 지역에서 3세기부터 계속된 묘지벽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실크로드 지역의 삶” 실크로드에는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거주하였거나, 길을 따라 오고 갔던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2002년 누란의 소하묘지(小河墓地)의 발견으로 이 지역에서는 약 4,000년 전 유럽계의 인종이 밀 등을 재배하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곳에서 발견된 나무미라는 백양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사람의 얼굴과 몸통, 다리가 구분되어 있다. 출토 당시 나무 관 안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매장 방식이나 관습, 몸에 걸친 옷 등이 모두 진짜 사람과 비슷하였다. 사람이 멀리 타지에서 사망하여 매장할 시체가 없어서, 나무 미라를 대신 안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실크로드 지역은 기온이 매우 건조하여, 금속으로 만든 물건뿐 아니라, 종이, 옷감 등도 섞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반원 형태의 빗주머니도 그 중 하나이다. 흰색과 붉은색 견직물을 꼼꼼하게 바느질하여 만든 이 빗주머니는 천 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마치 사용할 수 있을 것처럼 잘 남아 있다. 현재 이 지역은 모두 이슬람을 믿고 있으나, 8세기 혜초가 이 지역을 지났을 무렵에는 모두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쿠차의 키질 석굴, 투르판의 베제클리크 석굴에는 당시 화려한 불교벽화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쿠차의 키질 석굴 제206호굴에서 발견된 벽화는 네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 위의 벽화는 왕이 큰 물고기로 변하여 굶주린 백성들에게 자신의 몸을 양식으로 제공한다는 내용으로, 석가 전생(前生)의 선행을 묘사한 그림이다. 마름모의 구도 안에 부처의 전생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 키질석굴 벽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매머리 장식, 중국 영하성 영등(永登)_높이 5.5cm_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
“둔황 막고굴과 왕오천축국전” 중국 장안을 향해 타클라마칸 사막 북쪽의 서역북로를 통해 동쪽으로 가거나,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서역남로를 통해 동쪽으로 갔을 때 결국 만나는 곳이 바로 둔황이다. 둔황은 중국의 서쪽 영토가 끝나고, 서역이 시작하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크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한 번영의 결과물이 바로 둔황 남동쪽 명사산 기슭에 벌집처럼 뚫려 있는 막고굴(mogao caves)이다. 둔황을 오가던 대상(caravan)들은 여행의 안전을 빌기 위하여 석굴을 조성하고 각종 불화를 그려 놓았다. 서역의 대상을 그린 그림에는 행장을 꾸리고 출발을 기다리는 대상의 모습, 낙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 강도와 싸우고 있는 모습 등 대상들의 실크로드 여행에서 겪는 어려움을 잘 나타내고 있다. 1900년 막고굴 17호굴에서 발견된 둔황 문서는 둔황을 비롯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왕오천축국전』은 8세기초 혜초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실크로드 지역을 답사하고 돌아와 쓴 것이다. 이는 7세기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문화.경제.풍습 등을 알려주는 기록으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둔황에서 장안까지” 둔황에서는 서쪽으로 난주를 거쳐 장안에 이른다. 둔황에서 난주까지는 남쪽으로 기련<치롄祁連>산맥, 북쪽으로 고비사막이 1,000km 정도 펼쳐져 있는데, 이를 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고 부른다. 한나라 이후 이 지역은 중국의 서쪽 변방을 이루고 있었지만, 중국이 쇠약해졌을 때는 독립적인 소왕국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4세기부터 5세기에 이르는 중국 혼란기에 하서 일대에 나타난 전량, 후량, 북량, 청해성 서녕(西寧)의 남량, 둔황의 서량, 즉 오량(五梁)이 바로 그것이다. 둔황은 11세기에도 사주 귀의군으로 독립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은 중국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독특한 성격의 문물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에서 가장 수량이 많은 청동의장행렬에는 청동 기사, 청동말, 청동수레 등 한나라 시대의 뛰어난 청동주조기술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의장 행렬은 2개의 기사용, 4개의 창을 든 기마무사용, 그리고 4개의 가지창을 든 기마무사용 및 도끼차, 주인차, 수레차, 손수레차로 구성되었다. 한편 매의 머리 모양을 이용한 장식은 알타이지역 스키타이인 등 유목민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것이었다. 감숙성 북쪽에 있는 영하(寧河)에서 발견된 동로마 금화는 이 지역에서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무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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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01218-세계문명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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