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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승순 展
'어떤풍경'
어떤 풍경_162x131cm_oil on canvas_2009
갤러리 이즈 제2전시장
2010. 10. 13(수) ▶ 2010. 10. 19(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00-5 (인사동길 9-5) | T. 02-736-6669
어느 순간_131x162cm_Acrylic on canvas_2010
분열적 인식론의 치유술 : 존재 내(內)로 스며드는 자연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갑옷을 벗어던짐 설승순은 그가 속해 있는 세계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사회는 그 자신이 전적으로 그 안에 거하고 싶지 않은 하나의 ‘틀’이다. 세계는 ‘참아내야 하는 무엇들이 가득한 곳’ 이상이 아니다. 현실은 ‘종종 무력감을 느껴야만 하는 어떤’ 것일 뿐 아니라, 타인과의 유대를 강요받아야만 하는 무거운 정거장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 현실과 일상에서 설승순은 이상(理想) 과의 견디기 어려운 괴리를 목격한다. 적어도 정신의 측면에서라면, 설승순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와 어느 정도 소속을 달리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지불한 온갖 사회적 불이익의 대가로 하나의 축복이 주어지곤 하는데, 명상적 시선(contemplative seeing)의 특권이 그것이다. 그것이 아니고선 신중하게 사물을 응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는 그런 시선이다. 작가의 이러한 시선은 거의 고스란히 그의 회화 속 인물들에 투사된다. 그들, 곧 설승순이 그려낸 인물들은 세계의 정복을 꿈꾸는 야심만만한 근대인이 아니다. 그들은 할 포스터가 현대인을 일컬었던 “갑옷을 입은 공격적 주체”가 결코 아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 벗고 있으며 창 대신 우산을 들고 있다. 그들이 갈증을 느낀다면, 그 대상은 정복이 아니라 소통이며, 전진이 아니라 휴식이다. 그들은 세계로부터 안전하게 격리되는 대신 차라리 세계의 희생자가 되는 쪽을 택한다. 희생이 적개심보다 더 인간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 때문이다. 공격적인 도구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방어하지 않는 것이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주 잠시 동안_131x162cm_Acrylic on canvas_2010
이렇듯 설승순은 자신에 대한 편집증이나 파시즘적 확장과는 거리가 먼 유형의 인간을 발굴해낸다. 그러한 사람만이 갑옷을 걸치는 대신 자연으로 나아가는 길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과 들녘으로 나서는데 창검을 들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는 라깡의 거울효과가 제안하는 그럴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어떤 내적 두려움에 의해 갑옷을 입고 돌진하는 인간을 지극히 정상적인 유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그를 둘러싼 세계와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그 내부에 충분히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 앞에서 설승순의 사람들이 그렇게 해내고 있다. 그들은 자연이 다가오고 스며들도록 자신을 빈 공간으로 유지한다. 풀밭에 눕고 대지에 귀기울인다. 자신을 자신으로 채우지 않음, 곧 어떤 명상적 가능성이 그들의 존재론적 특성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정적인 동작과 중저채도가 대변해주 듯, 어떤 상황에서도 그들은 부산을 떨지 않는다. 때론 단지 윤곽으로만 존재함으로써 자신을 확고하게 철회시킨다. 강은 조용히 흐르고, 산은 높지 않음으로서 이에 화답한다. 리듬은 완만하고, 시간은 빨리 흐르지 않는다. 모든 대상이, 살아있는 것들이, 강과 산과 구름과 나무와 숲과 새, 그리고 우산과 막대기와 사람들이 서로의 윤곽과 모서리들을 흐리면서 조금씩 뒤섞인다.
풍경 속으로_46x38cm_oil on canvas_2010
현실과 비현실의 혼돈 그의 <사람, 나무, 물>을 보자. 이 세계에서 사람과 자연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의 몸은 무릎까지 찬 강물과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존재는 주변경관의 연초록빛에 동화되고, 수초가 자라는 연못의 일환이 된다. 자연은 존재 외부의 대상, 객체, 관상용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보기 좋은 경관을 넘어 존재 내로 초대된다. 존재와 존재의 외부, 인간과 자연, 주체와 대상이 점진적인 연대의 과정에 들어선다. 파시즘, 정복, 분열, 순환의 중단이 치유와 회복의 계기들과 접촉한다. 또 다른 회화 <어떤 풍경>에서 설승순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가 보다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도 존재와 강은 각각 별개의 차원이 아니다. 뒤섞일 수 없는 상이한 범주도 아니다. 연한 비취빛을 띠는 강물은 손을 물들이고 어느새 가슴까지 차오른다. 존재는 강(江)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고 그것의 일부로 귀속된다. 화면의 수평적 분할은 이 정체적 완화의 드라마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정체적 완화의 드라마는 <푸른 고요함>에 이르러 같은 작품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여기서 눈은 더 이상 신체기관이기를 포기한 채 스스로 강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사물들을 제각각 분리된 것으로 지각하고 인식한다. 존재와 존재 이외의 것들을 나누고, 대상들을 다른 대상들로부터 끊임없이 분리해낸다. 그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색인화 한다. 그것이 우리가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이고, 현실을 ‘진정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설승순의 세계는 이러한 인식론의 폐해를 복구시키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원래의 유동성을 회복하는, 사람과 자연의 수평적 공존을 허용하는 하나의 지평이 확보되는 것이다. 이는 분열되었던 것들이 다시 하나가 되는 거시적인 과정의 설득력 있는 알레고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단지 비현실적인 상상의 산물이거나 관념의 시각적 알레고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그것이 오히려 현실이라고 말한다.
“현실의 범위와 진정성에 대한 질문이 오랫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들같이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이따금 느끼는 낯섦과 뉴스나 신문 등에서 접하는 여러 사건들이 종종 비현실적이라는 느낌 등은 현실과 비현실이 구분된다는 개념을 모호하게 한다. 현실이라는 것도 우리가 직접 보고 느껴서 정의할 수 있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주보다_53x46cm_Acrylic on canvas_2010
이어지는 작가의 질문은 부드럽지만 더욱 핵심에 다가선다. “만약에 어느 한 사람이 바다를 떠올리면서 포즈를 취했다면 그 바다는 어느 차원에 위치하는가, 너무 골똘히 바다에 몰입하여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된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것을 넘어선 무엇이 아닐까” 설승순이 옳다. 존재의 깊은 곳에서, 그리고 ‘깊은 몰입’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가담자가 되고 마는 그런 차원이라면, 그것은 분명 생각 이상이다.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진짜 현실일 개연성이 높다. 반면 우리가 현실로 간주하는 소란스러운 현상계는 현실을 은폐시키는 비현실의 궤계일 공산이 크다. 세계는 왜곡되어 있다. 우리의 인식체계가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곡된 세계는 끊임없이 다가오며 속삭이고 우리의 인식체계를 동화시킴으로써 진정한 세계, 진정한 현실로부터의 격리를 양산한다. 이 격리는 우리가 현실로 지각하는 비현실을 굳세게 붙잡으면 붙잡을수록 더욱 극심한 것이 된다. 우리가 그토록 자주 허우적거리면서 비현실을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보이는 것만을 기반으로 사유함으로써 비현실과 현실을 혼동할 때, 우리는 미로를 벗어날 수 없는 생쥐, 관습과 규범에 붙박힌 노예, 벗어나기를 희망할수록 구속되고, 버둥거릴수록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톨스토이는 평생 이 뒤집히고 전복된 현실과 비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자신으로선 가장 힘겨운 싸움이었노라고 고백했다. 바로 이곳, 톨스토이가 전 생애를 건 힘겨운 싸움을 벌였던 바로 그 전장이 설승순의 회화를 지지하는 주춧돌이 놓여있는 곳이다. 현실의 비현실적 정체를 직면해야만 하는 곳, 반면 보이지 않는 현실의 차원이 추적되어야만 하는 지점 말이다. 이곳은 진정한 현실을 살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경유해야만 하는 정거장이다. 들리는 음악을 넘어 들리지 않는 선율을 듣고 싶다면, 이 세계를 거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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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01013-설승순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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