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ck of ElectricityⅡ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

참여작가 : 송호준, 유비호, 장우석, 전병삼, 최종운

 

 

송호준_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_알루미늄 설치_2006

 

 

스페이스 캔

 

2010. 10. 1(금) ▶ 2010. 10. 21(목)

Opening : 2010. 10. 1(금) PM 5:00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46-26 | 02-766-7660

 

can-foundation.org

 

 

유비호_The Lonely Planet_Remote Control Car, wireless camera, LED, PDP, stand, installation_2010

 

 

Lack of Electricity Ⅱ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

백곤 | 미학, 모란미술관 학예사

 

1. Lack of Electricity

미디어아트 분야의 확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962년에 나는 13대의 중고 텔레비전을 사들였다. 나에게는 미리 정해진 작품 구상이 없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두 개의 주파수를 동시에 설정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그냥 쉽게 해버렸고 그 수평과 수직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실수와 실수를 거듭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항상 긍정적이었다. 그것이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전부이다." 미디어아트, 혹은 디지털아트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미디어아트라는 단어에는 함정이 숨겨져 있다.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구조와 모듈들로 중무장한 최첨단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미디어아트를 만들어낸다는 편견, 바로 그 편견에서 오는 오해가 작품과 감상자의 사이를 더욱더 떨어뜨려 놓고 있다. 미디어아트의 정의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미디어(media)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했을 때, 미디어아트는 전자적 미디어를 통해 비물질화 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미디어아트에서 전자적이라는 말을 빼버린다면, 혹은 비정상적인 전자 상황이 연출된다면 메시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바로 <Lack of Electricity>의 최초 물음이었다. <Lack of Electricity>는 두 가지의 질문을 던졌다. 첫째, “미디어아트, 전기 나갔을 때 대처방안(2009)” 둘째,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2010)”이다. 전자는 반성적인 측면에서 전기가 나간다는 가정 하에 미디어아트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고, 후자는 최첨단 과학기술의 사용과 전기의 극대화가 미디어아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살펴보는 질문이다. 그러나 기실 질문은 똑같다. ‘오류가능성의 예술적 가치’를 통해 미디어아트 분야에서 예술의 의미를 확인해보자는 말이다. 미디어아트를 바라보는 정상적인 선이해(그것은 정말 미디어아트에 대한 일반적이고 일방향적인 편견이다)에 바이러스를 침투시키는 일, 그것이 바로 백남준이 행했던 오류가능성의 실험들이었다. 오류, 부족 혹은 결핍이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해석의 기준들이 바로 이 프로젝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자! 이제 <Lack of Electricity>프로젝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두 번째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장우석_버섯구름_109x79cm_Ball point pen on paper, digital drawing_2009

 

 

2. 운동에너지의 액화(the Liquefaction of Potential Energy)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 <Lack of ElectricityⅡ>의 타이틀은 다소 모호하다. ‘운동에너지의 액화’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사용되었고, ‘언제나 새로운 기술’은 이번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차근차근 타이틀의 의미를 따라가 보자. 운동에너지(potential energy)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운동에너지는 물체 m과 중력장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존재하는 에너지이다.’ 단순한 공식을 대입시켜 물체를 예술작품이라고 가정하고 중력장을 인간의 사고라고 가정해보자. 예술작품과 인간사이의 운동에너지는 인간의 의식과 예술작품의 상호작용에 의해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용어로 정의 내리지 못하고 범위만 설정할 수밖에 없는 이 개념이 바로 운동에너지이자 가능성을 내포한 예술에너지인 것이다. 미디어아트 연구는 바로 이 지점, 상호작용의 파장에 의해 형성되는 에너지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을 통해 주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적인 자기인식의 해석방식이 적용된다. 역설적이지만 미디어아트를 규정하기 위한 연구는 미디어아트를 해석하기 위한 틀을 확인하는 일이고, 이것을 위해 자기인식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잠재된 에너지를 활용해야 한다. 여기서 미디어아트의 자기반성과 성찰을 위해 확인되는 잠재에너지는 미술이라는 중력장에 의해 그 한계를 드러내지만, 반대로 중력장의 해석범위 안에서 새롭게 위치 지워질 수 있다. 바로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미디어아트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운동에너지, 즉 잠재태인 에너지가 액화된다는 말은 무엇인가? 고체, 액체, 기체는 에너지를 흡수하고 방출함에 따라 상태변화가 일어난다. 그 중 기체에서 액체로의 변화는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낮은 에너지 상태로의 변환이다. 액화는 기체가 에너지를 방출하여 분자운동에너지를 줄어들게 하고, 분자간 거리를 좁혀 액체로 시각화하는 물리적 변화이다. 이를 앞서 설명한 잠재적 에너지에 거칠게 대입해본다면, 예술에서 액화는 예술작품과 인간의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잠재적 에너지를 시각화 시킨다는 말이다. 그 시각화에는 분명 분자와 분자간 거리가 좁혀지는 현상, 즉 만남이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여기서 분자를 전자기술이라고 본다면 전자기술(과학)이 예술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바로 시각화, 즉 액화의 쟁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운동에너지의 액화는 과학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시각화의 지점을 확인하는 일이며, 예술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는 작가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방출시키는 일이다.

 

 

전병삼_REALITY_포스트잇, 빔프로젝터 설치_2010(FloorPlan)

 

 

3. 기술을 바라보는 다섯 시선

이번 전시에 참여한 다섯 작가는 교집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각기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송호준은 공학을 전공하고 인공위성을 만들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고, 유비호는 사회개입을 위해 야구를 한다. 장우석은 음악, 회화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다 디지털 드로잉 기계조수를 고용하였고, 전병삼은 미디어아트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다 융합예술을 추구하는 회사를 운영하며, 최종운은 동력장치를 사용하여 작품의 의미를 변화시킨다. 이들 다섯 작가가 이번 Lack of Electricity Ⅱ의 주제 “운동에너지의 액화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질문에 대해 각기 내놓은 대답들을 살펴보자.

송호준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aka. Weapons of Mass Happiness)>의 두 번째 버전을 내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핵폭탄이 터져도 부서지지 않는 강력한 무기이다. 지배이데올로기를 유지시키는 권력인 군사기계는 폭력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기술은 폭력기계를 끊임없이 개발함으로써 ‘공포장치’를 통한 인간의 통제시스템 구축에 일조한다. 송호준은 바로 이러한 권력의 문제를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두 번째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부수는 것이다. 관객들이 망치를 들고 그의 작품을 내리치면 ‘사랑해’라는 달콤한 소리가 들린다. 그의 작품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성적인 기계(version.1)마저 부수는 행위를 통해 기술이 인간의 의식과 사회시스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유비호는 사회시스템과 미디어의 통제성에 대한 저항적 실천을 행하고 있는 미디어아티스트이다. 특히 그는 사회와 인간을 효과적으로 통제, 혹은 지배하기 위한 매스미디어의 허구성에 대해 폭로하고 개개인의 개입과 실천을 유도한다. 이번 작품 <외로운 행성 The Lonely Planet>에서는 이러한 미디어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개인의 시각이 어떻게 재단되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관객은 리모트 컨트롤을 사용하여 카메라가 장착된 무선자동차를 움직인다. 그러나 관객은 마치 게임을 하듯 자신이 직접 컨트롤하고 있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단지 스크린을 통해 파악해야 한다. 인간의 시각을 확장하는 기술미디어는 스크린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의 눈을 통제한다. 그는 감시와 통제를 위한 이미지를 생산하는 기술미디어의 시스템에 대해 폭로한다.

장우석은 플로터(plotter)라는 기계에 연필이나 볼펜을 끼워 제작한 디지털 드로잉을 선보였다. 그의 디지털 드로잉은 복제와 대량생산의 시스템에 제동을 걸고, 장인의 손맛을 느끼게끔 하여 예술에 대한 인간의 감성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는 인간의 행위가 결여된, 혹은 부족한 상태의 디지털 기술이 과연 만족할만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이번 작품 <Stamp Mosaic - Hi Mr Kim>에서 그는 판화기법을 이용하여 김정일의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전체를 이루는 부분이미지들은 디지털 비트를 연상하듯 픽셀화 되어 있는데, 그것들은 곰돌이, 자동차, 꽃, 하트, 별무늬 등 예쁘고 아름다운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그는 세계유일의 고립국가, 공산국가의 수장을 인식하는 시각체계에 오류가 있음을 작품을 통해 그리고 스탬프를 제작하는 관객들의 참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전병삼은 작품에 대한 개인의 참여와 참여자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작품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다. 그에게 디지털 기술은 개인과 개인, 혹은 분야와 분야간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원활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2009년에 선보였던 작품 <Lack of Energy>는 기술지향의 관점이 얼마나 강요된 것이고 고착화 된 시선인지를 보여준다. 발전의 메커니즘은 진보라는 가치를 개인에게 훈육시킨다. 전병삼은 바로 이러한 기존의 가치들을 위트 있게 전복시키며 기술에 의해 생성된 관념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의 이번 작품 <REALITY>는 빔프로젝터라는 확장된 시각기계를 통해 테이블 위에 놓인 여섯 개의 메모지를 보여준다. 몇 개의 메모지는 실제이고 몇 개는 허상이다. ‘Reality'라는 텍스트 또한 실제이거나 허상이다. 하지만 여섯 개의 이미지 모두는 인간의 눈앞에서 실재한다. 디지털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가상현실의 개념을 넘어 실재하는 시지각 시뮬레이션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 하고 있는 인간의 지각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진다.

최종운은 이미 각인된 사물의 의미를 약간의 기계장치를 통해 변환시킨다. 가령 코카콜라가 회화나 영상의 재료가 되고, 리본과 실 커튼이 아름다운 소리와 파도이미지를 만들어내게끔 한다. 그에게 기계장치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인식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예술의 의미를 확인하게 하는 매개물인 것이다. 작품 <Remove Mountains>는 움직이는 산맥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정되어 있는 산이 움직이는 예측 불가능한 운동성을 재현한 이번 작품은 간단한 용수철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장치로 전자적 기술이 아닌 산업기술을 활용한 것이다. ‘기적을 행하다’라는 뜻을 지닌 이번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단지 기술이 아니라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인간의 의지에서 출발함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는 기술을 다루고 바라보는 사람의 감성과 태도가 중요함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움직임을 만들어내야 하는 단순한 기계장치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최종운_Remove Mountains_160x80x120cm_table, steel, spring, form_2010

 

 

4. 언제나 새로운 기술

다시 전시의 주제로 돌아가자. 새로운 기술은 예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21세기 디지털 테크놀로지 사회, 맥루한의 예견처럼 미디어는 인간 감각의 확장을 통해 그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은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기술지향적인 차원에서 미디어아트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기술은 그것을 활용하는 사용자에 의해 변화되고 확장된다. 이제 플루서(Flusser)의 주장대로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잘 놀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코드가 필요한데, 그 형식을 바로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술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 언제나 새롭다. 그러나 발전의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기술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오류에 빠지는 길이다. 기술이 변화한다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지각에 변화가 일어 또 다른 새로운 기술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Lack of ElectricityⅡ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은 기술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관점에 대한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기술은 발전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오류의 지점들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전기가 부족하다고 예술이 퇴보하거나 혹은 아날로그로 회귀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은 만남을 요구한다. 사회시스템과 기술과의 관계, 혹은 과학과 예술과의 만남은 인간의 지각 속에서 작동하는 잠재에너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새로운 기술의 활용은 예술을 보다 예술적으로 만들기 위한 매개체인 것이다. 실험은 계속된다. ‘오류와 부족’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예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모색하게 할 것이고, 백남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술을 장난감 삼아 한바탕 놀이를 즐길 것이다. 그렇기에 기술은 언제나 예술과 함께 길을 걸어간다.

 

5. 예술의 조건

미디어아트는 기술과 함께 새로운 가능성과 대안을 창조해내지만, 기술에 기대는 것이 아닌 인간의 감성을 지향하고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Lack of Electricity Ⅱ>는 미디어아트의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닌, 현재와 과거를 살펴보는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전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기가 없다고, 혹은 전기가 넘쳐난다고 예술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이 과연 달라질 것인가? 우리는 미디어아트를 통해 ‘오류가능성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질문과 작가들의 대답, 그리고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을 공유한 연구원들의 열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은 이제 한 사람의 천재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관객간의 커뮤니케이션, 작가와 이론가들의 대화, 과학기술과 예술과의 만남이 예술작품을 완성시킨다. 디지털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예술은 잠재적 에너지를 확인하는 일이자 인간의 감성을 서로 공유하는 일이다. 감성적 공유는 예술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다. 그렇기에 전자적 에너지의 활용에 대해 반성하고, 기술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2년간 진행된 <Lack of Electricity>의 거친 질문들에 진지하게 작품으로 답해준 작가들과, 함께 고민을 공유한 연구원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자! 이제 <Lack of ElectricityⅡ 운동에너지의 액화 - 언제나 새로운 기술>의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볼 시간이다. 미디어아트에 대한 연구가 어떠한 예술의 조건들을 충족시키는지? 기술이 과연 예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다른 질문을 생성시키는 물음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vol.20101001-Lack of ElectricityⅡ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