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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展
<서울미술관 기획 초대전 - 아름다운 우리강산>
아름다운 우리강산_162x112cm_2003
서울미술관 전관
2010. 6. 1(화) ▶ 2010. 6. 6(일) Opening : 2010. 6. 1(화) PM 6:00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43번지 대일빌딩 B1 | 02-732-3314
아름다운 우리강산_315x112cm_2005
가장 한국적인 회화라고 일컬어 지는 원로서양화가 이한우 화백의 <아름다운 우리강산>展이 인사동의 서울미술관(전관)에서 열린다. 이번 초대전에서 아름다운 우리강산 대작 시리즈 60여점을 선보인다. 이한우의 작품 앞에 서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내용은 너무나 평범하다.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 주변의 풍경 또는 오래전에 살았던 곳의 풍경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일반적인 그림의 관성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며 그 독특한 시방식(視方式)이 불러일으키는 신선함에 망연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런 유형의 그림을 본적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생소함이 주는 신기와 더불어 그 자립성이 지니는 당당함이 어떤 감동으로 우리에게 밀려온다. 이한우는 <국전>을 통해 성장했으며 추천, 초대작가의 반열에 오른, 아카데미즘의 방법을 충실히 실행해온 작가였다. 그가 그만의 독자적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한것은 90년대 중반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2000년대에 와서 프랑스 파리 MB화랑 초대 개인전을 기해 파리화단에 알려졌으며 때를 같이 하여 국내 개인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2005년 파리룩상부르 미술관에서의 프랑스 상원 초대로 열린 개인전을 기해 그의 명성은 더욱 확고한 것으로 다져졌다. 2000년대에 오면서 그의 활동은 한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눈부실 정도로 펼쳐지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인지도 그만큼 높아져가고 있다. 처음엔 당혹했던 사람들도 점차 그의 작품이 지니는 신선함에 매료당하기 시작했으며 그 독자의 방법이 주는 당당함에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우리의 고향에 대한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이 주는 의미를 각별히 되새기게 하고 있다. 고향을 잃어버린 도시인들에게, 그들의 건조한 삶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고향의 이미지는 삶에 윤기를 더해주는 것이 되었다.
아름다운 우리강산_53x45.5cm_2009
<아름다운 우리강산>시리즈는 작가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통영의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어느덧 특정한 장소개념을 떠난 우리의 보편적인 강산의 이미지로 확대되었다.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그의 그림은 누구나의 고향이 되고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표상이 된다. 전통적인 화법을 무시한, 마치 민화의 소박한 표현처럼 누구에게나 쉽게 어울리는 표현체계는 더욱 친숙한 고향의 이미지에 걸맞는 것이 되고 있다. 그가 구사하는 시점은 언제나 약간 높은 언덕에서 돌아오는 사람이 고향마을로 들어서는 고개 중턱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시작이다. 그것은 단순히 바라보는 어떤 풍경이 아니라 아련한 그리움으로 에워싸인 풍경이다.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은 바로 고향집으로 달려가기 보다 약간 멀리서 고향집을 바라보면서 갖가지 추억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시간이 잠깐 머문 듯한 한가로움이 화면 전체에 번져나간다. 짙은 양광으로 인해 가을날 잘 익어가는 과일처럼 영글어 가는 풍경은 안으로 살찐 탄력이 팽팽한 인력으로 다가온다. 풍경이, 풍경속의 대상이 이렇게 탄력 있게 보이는 것은 그 특유의 묘출의 기법에 기인된다. 그는 모든 대상을 뚜렷한 윤곽선으로 그려나가면서 대상전체를 일률적인 검은 선조로 연결시켜나간다. 그래서 대상은 뚜렷하게 개별로서 드러나지만 동시에 전체의 풍경 또 하나의 개별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것들은 하나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를 이룬다. 뚜렷한 검은 윤곽선은 마치 엽맥 같기도 하고 인간의 혈관 같기도 하다. 그래서 풍경전체는 혈관을 내장한 생명체처럼 건강하게 맥박치는 인상을 준다. 이 같은 기법은 민화에서 엿볼 수 있는 대상의 평면화를 연상시키게 한다. 화면에 탄력과 밀도가 넘치는 것도 이에서 연유됨이다. 이 살아있는 실체로서의 풍경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정경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이어령이 지적한대로 “우리의 생명, 우리풍토의 결”을 그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우리강산_53x45.5cm_2005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한 바대로 황갈색이 주조가 되면서 때로 강한 원색들이 첨가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풍토가 지니고 있는 원형으로서의 색채이다. 풍경속엔 다양한 색채들이 등장될 수 있으며 특히 들녘과 산야의 풍경엔 초록이 기조색이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럼에도 잘 익어가는 황토색으로 주조를 선택한 것은 그가 단순한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강산의 원형을 탐구하려는 데서 기인된 것일 것이다. 우리풍토의 결을 묘출하기 위함일 것이다. 정연하게 펼쳐지는 잘 가꾸어진 밭, 마을과 들녘사이를 메꾼 밀집된 나무들, 그리고 멀리 달려가는 산맥의 힘찬 기운이 하나같이 우리풍토의 결을 묘출하고 있음을 간과해서 안 될 것이다. 주름살로 대상을 파악해가는 방법은 전형적인 동양의 묘출방법이다. 음영이 없이 주름살에 의해 원경과 명암을 함축해서 그리는 묘법은 동양화 고유의 방법이다. 서양인들이 이한우의 작품에서 나타내는 놀라운 반응은 전통적은 서양화에선 전혀 엿 볼 수 없는 정경의 묘출에 기인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의 물감으로 시술되었지만 묘사의 방법은 한국 고유의 산수화의 기법이기 때문이다. 수묵과 종이란 산수화 고유의 재료에 의하지 않고 캔버스와 유채란 서양의 재료에 의했기 때문에 단순한 동양화의 서양적 재료의 원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한 재료에 의한 번안에 지나지 않게 된다.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한우의 작품을 이런 단순한 카테고리로 묶어버릴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엔 동양 고유한 묘출의 방법에 기인되지만 동시에 그 독자의 조형화의 체를 거친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새롭게 태어난 또 하나의 방법으로 치부될 수 없다. 여기엔 동양화에도, 서양화에도 없는 그 고유한 방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서양인들이 그의 작품을 두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것은 이 독창성에 귀결된다. 많은 한국인들이 신기하듯 그의 작품을 보게 되는 것도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이 지닌 독자성에 대한 놀라운 반응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방식이 독특한 만큼 무한히 연결되는 진열의 방식 역시 독특하다. 벽면전체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우리강산>시리즈는 하나하나 개별의 화면이 이어져 전체가 되는 구조를 띤다. 화면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존재감을 지니지만 동시에 전체의 부분이기도 하며 종내는 전체를 향한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같은 진열방식은 마치 파노라마를 보듯,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강산의 풍경을 한눈으로 빙둘러보게 된다. 그것은 종내 보는 사람과 보이는 풍경이 하나가 되는 경험에서 나아가게 한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아니라 몸전체로 체감하는 풍경이 되면서 말이다. 이한우의 작품의 영역은 아름다운 우리강산이 중심이 되면서 점차 소재의 영역을 확대해가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십장생>과 같은 우리고유의 상징적 도형이나 파리의 풍경같은 이국의 풍경들이 끼어들게 된다. 아마도 그의 왕성한 창작욕의 결과일 것이다. 어느 한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부단히 자신을 실험의 장으로 이끌어가는 태도는 진정한 창작자만이 가질 수 있는 덕목일 것이다. 오광수 / 미술평론가
노틀담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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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00601-이한우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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