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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종 展
'Museum Project'
N # 0615 project_2009
노암 갤러리
2010. 5. 14(금) ▶ 2010. 5. 23(일)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33 | 02-720-2235
D # 0601 Project_2009
정신없는 공간, 흐트러진 사물들
이은종 사진의 밑그림 ; 근대 미술관의 미술정치학 근대 미술관 이후의 새로운 미술관에 관한 논의는 ‘지금.여기’의 미술담론과 구별되지 않는다. 근대의 종식은 결국 ‘그때.거기’의 사회적 체제, 제도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또한 모든 문화적, 예술적 신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역사화 될 것이다. 시간의 뒤를 원근법으로 밀고 당겨 선명하게 초점을 맞춰도 ‘그때.거기’가 ‘지금.여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가 근대 이후를 말하기 위해선 근대의 내부로 직핍해 들어가 그 본질을 뒤집어 까거나 해체해야 하고, 재구조화.탈구조화, 재맥락화.탈맥락화의 사유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과정에서 탈각된 근대의 더미를 소각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지금.여기’의 담론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를 거쳐 미술이 가장 구조적인 제도, 신체로 탄생한 것은 미술관이다. 작품 창고에 불과했던 미술관이 화이트 큐브를 얻어 작품의 재구성을 이루면서 미술사의 정치성을 뒤 흔들었고, 미학의 역사적 동일성을 거부했으며 아방가르드 정신을 컬렉션하기 시작했다. 창고관리와 목록작성의 조직체계는 분화를 거듭하여 단지 기관에 불과했던 미술관을 하나의 신체, 즉 살아있는 몸으로 변화시켰다. 수집 보존 관리 연구 전시 교육 서비스 등 일곱 개의 키워드는 미술의 사유와 실천이 발생하고 확장, 수렴되는 몸의 구조들이다. 근대 미술관의 탄생은 ‘근대미술’이 보여 주었던 미술의 혁명과 정치, 그 증거들의 컬렉션과 맞물려 있는데, 집요하고 광범위한 ‘명품’ 컬렉션을 통해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근대 미술관은 끊임없이 ‘근대’를 내부로 빨아 들였다. 오늘날 20세기의 많은 미술관들은 그들이 비판했고 넘어서고자 했던 ‘과거’가 되었으며, 아방가르드의 포만감과 피로함에 놓여 있다. 또한 그들이 주목했던 시대의 ‘그때.거기’는 큐브 안에서 요약 정리된 표준전과처럼 딱딱한 미학, 관념의 미술사, 거동이 불편한 운동을 들려주고 있을 뿐이다. 팝아트의 장인들, 추상표현주의의 장인들, 심지어 다다의 장인들은 더 이상 새로운 언표를 띄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대표작을 입고시킨 뒤 작고한 무형문화재가 되었거나 제도화된 명성에 힘입어 유령처럼 세계를 떠돈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꼬리에서 요란스럽게 타 오른 모더니즘의 불꽃은 근대의 소각이자 근대미술의 다비식이었다. 오늘날 ‘지금.여기’의 미술관은 당대 미술의 정치가 가장 왕성하게 기획되고 소비되는 현장이다. 근대 미술관이 완성한 기관의 신체는 이제 내, 외부를 구분하지 않는다. 현대미술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하며, 스스로 사건의 발화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포스트 뮤지엄 시대는 이미 근대가 타버린 자리에서 싹텄고, 한국의 현대 미술관은 역설적으로 고작 10년에 불과한 역사 때문에 그 싹의 행운을 맛보고 있다. ‘그때.거기’의 미술을 어떻게 해체하고 재사유할 것인가 못지않게 ‘지금.여기’의 미술이 더 많이 조직되고 있는 것은 그 현상이다. 두주에서 한 달 혹은 두 달, 심지어 수개월에 걸쳐 전시되는 작품들의 대부분은 미술관 컬렉션과 상관없이 초대를 받고, 전시 종료와 함께 흩어진다. 미술의 종착지였던 미술관이 플랫폼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 미술관이 추구했던 컬렉션의 정치성을 전시의 정치성으로 바꾼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사진의 타격 ; 상실의 미술에 가하는 셀프 서비스 미술 이은종의 사진은 미술담론을 미술관 담론으로 바꾼 뒤 그 신체 내부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생생하게 벌어지는 정치성의 현장을 포착한 것이다. ‘가는’ 전시와 ‘오는’ 전시사이, 해체.철거와 구조공사의 틈으로 잠입하여(공식적인 잠입이지만) 불화의 구축에 성공한 벽들이 가볍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들을 기록했고, 다시 세워지는 공간을 박았다. 그 공간은 언어가 생성되기 전의 분절된 단어들을 연상시키고 파열된 음처럼 고르지 못한 소음들로 가득하다. 기관들은 신체를 이루지 못한 채 떠돌고 사유될 수 없는 미술의 허영과 욕망과 아집의 그림자가 떠돈다. 작품들은 포장된 채 혹은 포장이 뜯겨진 채로 쓰레기와 장비들, 파티션 구조물들과 어울리며, 주민등록을 상실한 노숙인과도 같이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그 상실의 자리에서 우리는 ‘셀프 서비스’하지 못하는 현대미술의 기능장애를 엿본다. 근대가 아니라 현대미술을 극복하기 위해선 동일하게 “내부로 직핍해 들어가 그 본질을 뒤집어 까거나 해체해야 하고, 재구조화.탈구조화, 재맥락화.탈맥락화”는 실천적 사유가 요청된다. 이은종의 사진에 등장하는 탈각된 전시의 더미들은 근대 미술관에서 포스트 뮤지엄으로 건너 온 이 시대가 근대와 다르지 않게 자신을 어떻게 정치화 하고 있는가를 증언한다. 그리고 그 더미들은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오를 것 같지 않다. 거대한 육질, 유혹적인 나체, 견고한 자본의 성채를 배경으로 가진 미술관의 외벽들은 소각 불가능한 ‘전시-기계’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은종은 그와 같은 기계 신체의 ‘장면’들과 적나라하게 노출된 장기들, 품격이나 고풍스러움, 모던함과 포스트 모던함, 일종의 ‘뮤지엄스런’ 느낌들과는 하등 관계없이, 어지럽고 산만한 미술관 내부 풍경을 ‘작품’으로 돌려놓는다. 이제 우리는 그의 사진의 ‘현장일지’에서 빠져나와 작품으로서의 ‘작업’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가 사진의 재사유로 미술과 미술관을 탈맥락화 한 지점은 그가 자신의 작품을 다시 화이트 월에 건다는 점이다. 근대, 근대미술관, 그때.거기, 지금.여기, 신체, 몸, 기계, 포스트 뮤지엄과 같은 키워드는 사실상 그의 작업의 밑 개념일 뿐 밖으로 타전하고자 하는 메타포는 모종의 ‘사진의 행위성’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전시가 발생하는 현장은 흥미롭게도 근대 미술관이 그토록 열렬하게 옹호했던 아방가르드의 어떤 한 양태를 보여준다. 최근 영국의 젊은 예술가가 20세기의 명작들을 던져 부셔버리는 전위적 퍼포먼스를 펼친 바 있는데, 이은종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그보다 훨씬 강렬한 ‘컨템포러리 아트’를 발산한다. 미술과 미술 아닌 것들이 섞여서 전시장에 널브러져 있거나 혼재한 상황은 그 자체로 당대 미술의 최전선이 아닐까. 그는 최전선의 미술을 목격한 목격자로서 그 증거물들을 전시장 내 거는 ‘행위예술’을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Gm # 1014 Project_2009
<D#0601 Project>(2009)의 핑크 룸은 페인트 공사가 한 창일 때 촬영한 것인데, 바퀴 달린 철제 아시바와 페인트 통들, 그리고 시점 없이 벽을 비추는 조명만으로도 훌륭한 전시이며, 작품이다. <G#0716 Project>(2009)는 제작된 파티션 구조물들이 자리를 잡았거나 아직 제 위치를 잡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놓인 형국이다. 패널을 절단하는 기계와 파티션은 공간연출 계획과 상관없이 끼어 든 그 순간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회화나 조각, 영상, 미술의 형식이 사라진, 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이 장면에는 어떠한 미학, 이론으로도 결론 내릴 수 없는 ‘자율성’이 존재한다. <G#1019 Project>(2009)는 전시장 벽면을 컬러링한 페인트 통들이 주제 작품이다. 미술관 내부에 이토록 당당하게 설치될 수 있는 ‘색-통’들은 화가의 작업실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일 터이다. 주인.작가도 없이 무방비적으로 놓인 통들에서 잭슨폴록의 액션 페이팅과 이브클라인의 신체 드로잉을 떠 올 릴 수도 있겠지만, 이보다 강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사진은 텅 비어있고, 또 다른 사진은 사다리와 사다리차, 설치되고 있는 누군가의 작품들이 혼재한다. 가장 인상 깊은 사진 중의 하나는 주황색 핸드 지게차가 덩그러니 놓인 작품이다. 핸드 지게차는 기계 설계자의 단순하고 강직한 디자인 컨셉이 마치 구조주의 미학의 모뉴멘트처럼 ‘설치되어’ 있다. 사진 속의 현장들은 이제 하나의 단일한 사진작품으로 전시장에 걸린다. 그 공간들은 익명화 되었으며, 간혹 사진 속에 등장하는 누군가의 작품들은 미학적 레퍼런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것은 포장재 쓰레기나 공구들, 목재 구조물과 페인트 통, 사다리차와 다르지 않게 하나의 사물로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거기, 사진 속 미술관의 벽과 파티션에, 바닥에 그의 사진들이 끼어 있다. 조명을 바꾸고, 벽에 칼라를 입혔다. 그리고 슬쩍 자신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그것은 정교한 이미지 조작이면서 미술관의 정치성에 대한 불편한 말 걸기의 시도이다.
“개입하고 발언하며, 스스로 사건의 발화자가 되기” 그는 ‘그때.거기’의 미술관과 전시공간들에 자신의 사진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개입한다. 넓은 좌대, 빈 파티션, 벽과 바닥에 그는 공간연출가 또는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작품을 설치해 넣는다. 전시가 해체된 자리에, 해체된 것들이 구조화되기 전의 공간들에 작품을 ‘끼워 넣기’함으로써 사건을 발화시킨다. <I#0615 Project>(2009)는 어느 미술관 수장고의 공사현장이다. 그의 작품은 공간의 잔해들 사이에서 푸른빛을 발하며 마치 누군가 잊고 철거를 하지 않은 것처럼, 기이하게, 낯설게 전시되고 있다. 스크레치나 크렉을 두려워하지 않는 작품의 위세는 전쟁의 폭력에도 견뎌야 하는 수장고의 본능을 닮아 있다. 완전히 뜯겨져 나간 공간의 구조물들 사이에서, 철근과 콘크리트, 벽돌이 생짜로 드러난 철거현장에서 그의 작품은 신기하게도 털끝하나 상한 곳 없이 멀쩡하게 걸려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현대 미술관에 개입하고 발언하며, 스스로 사건의 발화자가 되기를 자청한다. 이것이 그가 근대 미술관의 미술권력과 현대 미술관의 정치성에 ‘사진 행위’로 잠입하는 이유이며, 상실의 ‘미술’을 향한 친절한 셀프 서비스 미술일 것이다. / 김 종 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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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00514-이은종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