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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근 칠예(漆藝) 展
4월의 빛_옷칠,색편,금박_2002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2010. 5. 14(금) ▶ 2010. 5. 22(토) Opening : 2010. 5. 14(금) PM 5:00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700(예술의전당) | T.02-580-1620
6월의 전설_옷칠,색편_2002
칠예(漆藝)로 탐색해 온 우주적 질서와 한국적 조형미
19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 공예부문에서 대상을 받은 바 있는 한남대학교 최영근교수가 오랜 세월의 무게를 깨치고 2010년 5월 14일부터 5월 22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5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세 번째 전시가 열린다. 작가이면서 교육자인 최영근은 ‘한시도 잊지 않고 작품이 나아갈 길을 생각하면서 작업에 임해 왔다’는 고백과도 같은 그의 말에서 우리는 긴 호흡 끝에 새로 열어 보이는 그의 세계가 몹시 기대된다.
한국적 미의식을 재료적 특수성에서 간파하고자 했던 작가 최영근의 20년간은 온통 전통 칠을 대변하는 옻칠에 몰두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전통 옻칠의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익히고, 나름대로의 새로운 조형적인 방법론을 얻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해 왔던 실험의 연속은 결국 모든 표현기법의 탐색으로 이어지고, 결국 공예적인 요소를 벗어나 추상적인 평면의 세계로 변화한다.
최영근 칠화의 세계는 극도로 절제된 동양화 한 폭과도 같다. 우주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그윽한 현(玄)의 공간은 마치 동양화에서 반전된 여백의 미를 감상하는 듯하다. 옻칠로 뒤덮인 검은 현(玄)이 주는 깊이감은 우주공간을 연상시키고 인간의 심원한 정신적 공간을 나타내며 <창세기>, <혼돈>, <빛> 등의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이는, 창조주가 새로운 우주를 만들며 겪어내었을 환희와 고통이 작가에게도 고스란히 함께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혼돈과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다. 혼돈과 무질서는 새로운 창조,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고 있다. 창조주는 혼돈의 상황에 하나하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조형 예술가는 혼돈과 무질서 상태의 생명이 없는 재료에 조형적 질서를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작품은 탄생된다.”
이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여정에 서 있었던 작가는 가장 한국적인 재료에 몰입하여 자신만의 본질적인 조형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그가 전통 칠이 가지고 있었던 제한적인 조건을 극복함으로서 보여주었던 21세기적이고 현대적인, 보편적 조형미로의 승화가능성은 또 다른 최영근의 성과로 보인다.
이번 전시에는 <창세기>나 <혼돈>등과 같은 우주적 신비와 창조의 깊은 추상성을 나타내는 큰 작품들이 대부분이지만 , 한편으로는 소소하지만 가깝고 친숙한 작품들이 함께하여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미감마저 감상할 수 있는 기쁨이 있다.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한정되어 바라보아왔던 전통 칠공예에 대한 편협한 시각이 이번 최영근의 칠(漆)을 통해, 보다 현대적이고 다채로운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길 기대해본다.
대지의 정_옷칠,자개_2003
대지에 대한 그의 애정과 하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대지에 대한 사랑을 붉은색으로, 밤하늘의 신 비함을 파란색으로, 대지의 심장부를 분출하는 강력한 불로, 무한한 빛으로 채워진 밤하늘을 무한한 공간으로 표현한다. 이런 작품들은 비록 사이즈가 작더라도 우리는 스케일에서 커다란 것들로 간주할 수 있는데, 우리가 수많은 반복된 형태들이 화면 밖으로 확대되는 것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빛II_옷칠,난각_1997
그는 이 작품에서 기하의 아름다움과 기하의 법칙을 최대한으 로 활용했으며, 동시에 빛을 삼차원으로 표현했다. 빛은 그가 선호하는 주제이면서 특히 그의 재료에 적합하다. 재료들은 빛의 광채를 표현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또한 화면을 채우고 있는 형태들이 커다란 스케일로 나타나며, 그것들은 관람자의 상상 안에서 화면 밖으로 한없이 확장된다. 빛이 질주하는 것이다.
신의지문_옷칠,난각_2000
흰색과 검은색이 만들어내는 실타래 같은 형태가 부풀어 올 라 구형을 형성한다. 이것은 신의 지문인 동시에 최영근의 지문이다. 그가 수없이 많은 선들을 무작위로 그려 넣은 원 형을 화면에 가득 채우자 선들이 뒤엉키면서 새로운 차원을 이른다. 그는 신의 오묘한 섭리를 사람의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진의 형태로 표현한다. 우주가 팽창하는 타원형이지 만 우리의 명상 속에서는 이와 같은 원형의 은하계이다. 선에는 난각의 점들이 빼곡 채워져 있으며, 끈 혹은 선은 끊어 지는 데 가 없이 하나의 전체로 연결되어 있다. 거기에는 오 로지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의 연속만이 있을 뿐이다
태초의에너지-삼라만상_옷칠,색편,금분,색분_2002
인간 활동의 근원인 힘인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것은 어려 운 일이다. 에너지는 우리의 몸속에 있지만 우리에게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에너지는 또한 자연의 현상을 지배하 는 힘이다. 이런 힘을 최영근은 검은 원형이 밖으로 퍼져 나가는 형태로 표현한다. 에너지의 신비를 나타내기 위해 그는 검은색 바탕에 광채를 발하는 무수한 점들을 기다란 물결치는 머리카락 같은 선으로 박아 넣고 외부에 불을 상징하는 힘으로 그것들을 에워쌌다. 검은색과 검붉은 색 의 조화가 이 작품에서 극치를 이른다.
창세기_옷칠,자개,색편_2000
최영근은 빛이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만물이 존재 할 수 있는 여건이 생성된 것으로 본다. 태초의 빛을 표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가 어두운 창공에 마름모꼴의 조형적인 빛으로 태초의 빛을 표현한 것은 만물이 조형적 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데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물리학자들의 설명하는 바와 같이 우주는 매우 조 형적인 신의 도시都市이다. 태초의 빛이 마름모꼴인 데 대 해서 나는 감동을 받는다. 더욱 나를 감동하게 만드는 것은 창세기의 기록이 작은 정사각형들 속에 빼곡 박혀 있는 것이다. 그가 자개로 알파벳을 깎아 만들어 창세기의 창조 설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중 요한 것이며, 걸작이다.
아우라 혹은 시간의 미학 : 칠예(漆藝)로 탐색해 온 우주적 질서와 한국적 조형미
장동광/독립큐레이터,미술비평가 1. 공예의 전통적 재료 중에 옻칠만큼 오랜 역사를 지니고 현재까지도 유전(遺傳)하는 질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옻나무에서 채취되는 수액인 이 옻칠은 가공되지 않은 상태일 때, 생칠(生漆)이라고 부른다. 표면발색에 따라 주합(朱合), 주칠(朱漆), 흑칠(黑漆) 등으로 불리며 주로 목가구나 그릇 등에 도포되어 자연친화적이고 독성을 중화시키고 내구성을 강화시켜주는 재료로 인식되어 왔다. 옻칠은 한 번에 채취할 수 있는 양도 그리 많지 않고 섬세한 기량과 공교한 손길이 요구되는 재료인 탓에 고금을 막론하고 귀하게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나전칠기, 목기, 목가구 등의 표면을 마감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온 이 옻칠은 건칠(乾漆)기법이 개발된 이후에는 동양화의 화선지와 같은 소지(素地)의 역할까지 감당해 왔다. 이 건칠의 방법은 이른바 목칠(木漆)에서의 목리(木理)나 목물(木物)의 자연미, 내구성, 실용성을 최종적으로 마감하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태, 문양을 규정짓는 기초적 바탕으로써 그 역할이 전이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영근의 칠예는 바로 이러한 건칠의 방식을 변용하여 평면 처리된 칠화면에 우주의 질서, 창조의 신비, 일상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해 지난 20여 년간 창작의 열정을 쏟아 왔다. 그는 1990년대 초반부터 회화적 평면 혹은 부조적 갈무리를 통해 칠예의 또 다른 예술적 지평을 열어보고자 했던 것이다. 이 은거적(隱居的) 세월 20년은 칠화 표면바탕 만드는데 몇 년, 색편과 계란껍질, 나전을 잘라 상감기법처럼 붙이는데 몇 년, 다시 표면을 갈고 갈무리하는데 몇 년으로 사실 쉴 새 없이 짜여진 일정 속에 흘러온 것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눈 돌리지 않고 오로지 학교의 작업실에 묻혀 긴 여정을 걸어 온 것이다. 작가에게는 어쩌면 일장춘몽 같았을 이 20년의 세월은 최영근의 예술세계를 꽃피우기 위한 침묵의 대평원이었고, 만개(滿開)를 향한 숙성(熟成)의 오랜 산고(産苦)였는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생애 두 번째가 될 이번 개인전은 최영근이 지난 20여 년간 탐구해 온 칠예의 회화적 표현결구(結句)들이 우리 앞에 빗장을 열고 나타나는 창연(蒼然)의 하늘인 셈이다.
2. 나는 최영근의 작품들을 일람하면서, 흑칠이 던져주는 깊은 사유의 우물 속에서 추상적 사유와 사실적 재현의도에서 빚어진 끝없는 창작의 일출적(日出的) 동요를 엿보았다. 그것은 어두움 속에서 일어서는 빛의 생명력이었으며, 카오스(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로 나아가려는 우주 질서의 자연적 원류(原流)였다. 그것은 또한 시작도 끝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순환적 관계성의 표지(標識)였으며, 시간과 공간이 경계 없이 만나는 조형의 교차로였다. 최영근의 칠화작품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비평적 단상들은 추출해 낼 수 있다. 우선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언급한 바 있는 ‘아우라(Aura)’ 개념을 그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벤야민은 자신이 제시한 아우라의 개념에 대해 ‘시간과 공간의 어떤 특별한 직물: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ein sonderbares Gespinst von Raum und Zeit: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최영근에게 있어서 시간성의 문제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작업 전 과정에 녹아있는 노동과 수공의 지난(至難)한 층(層)들의 집합체(集合體)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시간의 미학이 하나의 날실과 같은 수평의 축이라면, 그의 작품이 표출하고 있는 형식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공간성의 문제는 씨실과 같은 수직적 축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에게 있어서 공간성의 문제는 추상적 자유곡선이나 기하학적 도형들을 구성적으로 조합하는 것에서 찾아진다. 즉 최영근에게 있어서 중요한 공간의 문제는 실공간(實空間)과 허공간(虛空間)의 관계성이다. 흑칠의 바탕면이 허공간이라면, 색편, 난각, 자개 등 미세한 조각들을 이어붙이면서 점이 선이 되고 다시 선이 면이 되는 과정을 거쳐 결과적으로 실공간으로서 형상을 구축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허공간과 실공간은 독립적인 다른 조형적 영토가 아니라 서로 상보적 관계를 이루면서 하나의 전체적 질서로 교직되고 있다. 마치 낮과 밤 혹은 어둠과 빛이 하나의 세상을 이루는 공존의 관계이듯이, 그의 작품은 이 작업공정의 지난(至難)한 시간성과 하나의 공존적 세계로서 공간성을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언급했던 아우라는 사실 주체와 객체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무엇보다 벤야민은 아우라가 일차적으로 예술작품의 물질적 특성에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그 물리적 속성이란 원본성(Originality), 진품성(Authenticity), 일회성(Ephemerality)에서 생겨난다고 파악하였다. 최영근의 칠화작품 중에서 <탄생-빅뱅, 2001>, <신의 지문, 2000>, <탄생-코스모스, 2002> 등과 같은 우주적 신비를 주제로 한 연작들은 ‘여기와 지금’ 혹은 ‘일회적인 현현(einmalige Erscheinung)’로서 종교적 숭배가치를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객체)은 칠예의 전통적 기술에 기반한 물질적 특성을 통해 ‘가까이 있지만 먼 곳의 일회적 현상(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으로서 관람자(주체)의 외경심(경배가치)을 자극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최영근의 작품은 우주의 보이지 않는 질서 혹은 절대자에 의한 천지창조의 종교적 신화에 대해 교감적 시선을 주고받고자 한다. 이 자연에 대한, 우주에 대한 교감적 시선으로서 우리가 그의 작품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곧 ‘저 먼 곳의 일회적 현현(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으로 아우라의 미학과 긴밀하게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우주의 창조적 기원(基源)에서 연원(淵源)한 주제의식들이 그의 전작을 관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최영근의 작품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종교적 신앙심의 발로에서 생성된 것 보다는 칠예라는 기법적, 질료적 특성을 가시화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시도한 측면이 크다고 보여 진다. 그의 작품을 통찰할 때,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무게를 둔 예술가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그가 대단히 철학적 태도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면이 아닐 수 없다. 예컨대 <창세기, 2000>이나 <한글 문자구성, 2001>의 경우를 보자. <창세기>가 성경의 창세기 1장부터 4장 23절까지의 내용을 알파벳 고문자를 일정한 규격의 사각형 틀 안에 자개조각을 붙여 구성했다면, <한글 문자구성>에서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직선과 원의 기하학적 구성미에 기반하여 제작한 것이다. 이 엄청난 시간과 공력이 요구되는 작품을 통해 그가 마치 깨달음을 얻으려는 수행자의 금욕적 태도를 읽어보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하는 작품 중에 <혼돈, 2001>, <태초의 울림, 1997>, <태초의 바람, 2005> 등은 나선형을 창조의 원리라고 보고 생성과 소멸, 차원의 이동문제 등을 다룬 것이라 하겠다. 최영근의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의 반영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우주 창조의 기원에 관해 다루고 있는 작품들에서 우리는 흑칠, 자개, 난각, 색편으로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라는 측면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의 향연, 광대한 우주의 질서는 우리의 유한한 삶,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저 먼 곳의 아득함 등과 같은 철학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다. 최영근은 이러한 소재들을 조형적 대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자연의 신비함과 우주적 질서를 형상화하는데 그가 가진 예술적 기량을 쏟아 부어 온 것이다. 그가 주로 빛, 에너지, 탄생, 바람, 별들의 길 등을 작품제목에 등장시킨 것은 바로 천지창조의 장엄한 세계, 태초가 생성되던 무렵의 원형적 질서를 칠예를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어떤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믿음은 어쩌면 과학적 증명을 넘어서 있는 어떤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최영근의 칠화작품들은 결국 세상의 유한성과 일회성을 자각하는 계기로서 ‘예술적 영원성을 향한 시선’들이라 명명해도 좋을 듯싶다.
끝으로 최영근의 이번 작품들은 한국적 정서나 민족 고유의 원형성(原形性)을 조형적으로 천착(穿鑿)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의 작품들에서 색편들은 대체로 오방색(五方色)의 색감으로 조율되고 있다. 이 오방색은 방위적인 색상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균형잡힌 우주 질서의 한 표상이기도 하다. <원융의 띠, 2003>, <대지의 정(精), 2003>, <빛-가을 속으로, 2006>, <심상 I-선열(禪悅), 2004>, <심상-한국인의 심상공간, 2002>, <호반야정, 1998>, <파적(破寂) I, 1999/ 파적(破寂) II, 2005>, <성가족 I, 2005/ 성가족 II, 2005>, <념, 2007> 등에서 우리는 여백의 미, 우리 민족 특유의 곡선이 지닌 포용의 미학, 적조미(寂照美) 등의 미적 특질들을 재음미하게 된다. 최영근의 칠화들은 이미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민족 고유의 전통적 칠예기법에 의해 창출된 것이기에 태생적으로 이미 한국적 미감을 발현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근작들이 전통미의 답습적 계승이나 기술적 구현에 함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적어도 한국적 정서나 민족 고유의 원형성을 탐구하려는 것에는 한국미의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새롭게 조형화하려는 간단없는 노력들이 배어있음을 간파해야만 한다. 그는 <성가족>이나 <파적> 연작에서 볼 수 있듯이 일상의 풍경들 속에서 시적(詩的) 감흥들을 부여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작업노트에서 언급되었듯이 과거, 현재를 연결 짓는 하나의 다리로서 칠예에의 길을 걷고자 한 것에서 잘 나타나 있다. 단순하면서도 정밀(精謐)하고, 단아하면서도 명징한 세계, 그가 추구하는 칠예의 길에는 ‘절제미(節制美)’의 깊은 우물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우물 속에서 전통 속에 녹아있는 한국적 정서를 바라보면서 추상적 사유와 재현적 정밀함을 교차적으로 오가면서 구현해 온 것이다.
3. 최영근의 칠화작품들은 이처럼 아우라의 미학, 우주의 창조적 신비, 한국적 조형성에 관한 현대적 해석을 담고 있는 조형적 구현체(具顯體)들이다. 자신이 개발한 고유한 색편 상감기법을 기반으로 마치 수도자의 금욕적 태도로서 지난한 시간의 강을 넘어서며 기도하듯이 구현해 내고 있다. 거대한 성(城)의 벽돌 층처럼 겹겹이 쌓여 올려 진 난각, 자개, 색편의 행렬은 시간의 고요한 살결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유들까지 흡수하는 듯한 흑칠의 명상적 바탕은 하늘과 땅과 인간 즉 천지인(天地人)에 관한 철학적 단상을 던져준다. 세상의 창조가 어두움을 걷어내는 빛에 의해 가능해졌다는 천지창조의 이론에 동의한다면, 최영근의 조형적 형태들은 이러한 종교적, 과학적 주장의 조형적 현현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불교적 화두가 그의 작품에서 커다란 의미소(意味素)로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해석에서 힘을 얻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직조,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 시적 사유의 조형적 재현의도 등은 최영근의 칠화가 가진 예술적 특질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빚어낸 칠화들은 영롱하고 찬란한 저 우주에서 날아 온 빛들의 향연들이며, 이 세상을 구축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에 부여된 생명에 관한 서사시(敍事詩)들이다. 특히 그가 조율해 낸 섬세한 수공적 손길에 의해 오케스트라의 음률처럼 시각 너머의 청각적 자극까지 동반하는 것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지점에서 그의 작품이 공예적 기술을 너머 예술적 심미성의 지평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미학적 계기를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태초의 울림>은 그가 빚어낸 칠화의 조형적 생명력이 영원성을 획득하고 있는 기념비적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손으로 그려진 무작위적 드로잉이 색편의 끝없는 이어짐으로 구현되면서 예술적 자유함의 극점(極點) 내지는 영원성의 미학을 상기시켜주는 그 무엇이 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이 언급했던 아우라의 미학적 정의가 최영근의 작품을 통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고 본다. ‘시간과 공간의 어떤 특별한 직물: 가까이 있더라도 먼 곳의 일회적 현상’. 최영근은 그렇게 지난 20년의 시간동안 칠화에 천착한 결과, 우리에게 아우라의 조형적 실체를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작과 끝의 끝없는 순환론적 관계성을 암시하는 흑칠의 세계 속에서 세상의 질서와 우주의 신비를 조형적으로 탐색해 온 최영근. 그의 이번 근작들을 마주하면서, 문득 벚꽃이 떨어지는 연못가에서 나누는 선승(禪僧)의 선문답 같은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꽃이 피는 것은 어둠 속에 빛이 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저 벚꽃이 떨어지는 연못은 너와 나의 우주가 아닐런가...알 수 없는 저 침묵의 흐름 속에서 끝없이 떨어지는 꽃들의 순결한 독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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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100514-최영근 칠예(漆藝) 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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