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展

 

- Looking at Myself -

 

안재홍_나를 본다_동_280cm(H) 설치가변형

 

 

우림 갤러리

 

2009. 12. 2(수) ▶ 2009. 12. 8(화)

초대일시 2009.12. 2(수) 오후 6시:00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30 - 27 | 02-733-3788~9

 

www.artwoolim.com

 

 

안재홍_나를 본다_동_200X 200(h)X 20cm

 

 

실존적 인간과 존재론적 자의식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창작주체의 이념이 이러저러한 감각적 형식을 덧입고 상형되는 것, 즉 이념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형식논리가 강한(흔히 모더니즘 서사에 의해 지지되는) 경향성보다는, 형상성과 서사성이 강한 경향성의 작업에 더 잘 어울린다. 신체를 소재로 한 안재홍의 조각은 형상성과 서사성이 강한 편이며, 그런 만큼 그 신체에는 작가의 남다른 이념이, 인간관이,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이 들어있다.

그 신체는, 말하자면, 예사로운 신체가 아닌, 작가의 남다른 이념을 표상하고 수행하는, 예사롭지 않은 신체며, 이념의 집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신체는, 신체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그 신체를 신체로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암시적이다(정보량과 암시력은 반비례한다. 즉 정보량이 적으면, 그만큼의 의미론적 공백이 생겨나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암시력이 강화된다). 오죽하면, 그 신체에는 얼굴도 없고, 수족도 없다. 얼굴이 없으니, 표정도 없다. 표정이 없으니, 개별성도 없다(작가의 작업에서 신체는, 평면회화로 치자면,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 환원되고, 그런 만큼 개별성보다는 익명성이 강조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한다. 비록 시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론, 개인적인 경험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이런 연유로 작가의 작업은 쉽게 공감을 끌어낸다. 그리고 이런 실루엣 형상으로 인해, 작가의 작업은, 심지어 입체의 형상을 띌 때조차, 조각이면서, 동시에, 회화처럼 보인다. 일종의 회화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부조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입체조각이 정통적인 환조와는 상관이 없듯, 드로잉 조각 역시, 다만, 조금은 평면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정통적인 부조와는 다르다).

그저, 겨우, 신체임을 암시할 뿐인, 애매하고 유기적인 덩어리가 있을 뿐이다(작가는, 도무지, 신체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옮겨놓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보다는 더 결정적인 일에, 이를테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애매하고 유기적인 덩어리가, 왠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포즈의 신체를 연상시키고(작가의 조각에서,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져 있는 포즈의 신체는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되는데, 바로 이 포즈의 특정성이 그대로 작가의 조각의 특정성으로 연결된다), 내면적이고 내향적인 경향성을 상기시키고, 암울한 정서를 자아낸다.

 

 

안재홍_나를 본다_동_250(H)cm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암울한 정서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실존주의다. 작가의 신체조각은, 그 속에, 실존주의적 인간관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론적 자의식이(하이데거),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어하는 자기소외가(사르트르), 삶은, 그저, 우연한 현상일 뿐이며, 도덕은, 다만, 인간의 자기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조리 의식과 이방인 의식이(카뮈) 스며들어있다. 이런, 존재론적 자의식이 짓누르는 무게가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신체로 하여금, 마치, 고치처럼, 안쪽으로 몸을 말아 덩어리 짓게 하고, 서 있을 때조차 웅크리게 하고, 걸음을 떼, 움직임을 암시할 때조차 엉거주춤하게 하고, 땅을 쳐다보게 만든다(작가의 조각에서 신체는, 결코, 단 한순간도, 정면을 주시하거나, 자기외부를 향해 열려져있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이 없다. 자기외부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자의 전형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제스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적 인간을 표상하는, 자코메티의 조각의 신체가 보여주는, 존재론적 자의식이 만들어준 상처를, 무슨 훈장처럼, 온몸으로 받아내며 똑바로 서서 정면을 직시하는 포즈와 비교된다. 여하튼, 두 경우 모두 실존주의를, 실존주의적 인간을 표상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작가의 경우에 존재론적 자의식이 자기 내부를 향해 열려져 있다면, 자코메티에게서 그 자의식은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져 있는 점이 다르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앉아있을 때도 그렇고, 서 있을 때도 여전히 그런), 그는, 말하자면, 그렇게 웅크려진 몸의 안쪽을, 자기의 내면을, 자기의 실존을, 자기의 (또 다른) 자아를, 자기의 타자를, 자기의 어둠을, 자기의 무의식을, 자기의 심연을, 자기의 침묵을, 자기의 광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웅크려진 몸의 안쪽을 통해, 자기가 유래한 근원(이유와 원인), 존재의 근원(이유와 원인), 세계의 근원(이유와 원인)을 직시하고, 그 근원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엔, 다만, 침묵(언어와 논리, 개념과 의미를 집어삼키는 인식론적 블랙홀)과 어둠(존재를 집어삼키는 존재론적 블랙홀)이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며, 존재의 근원도, 존재하는 이유와 원인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예정된 실패, 알려진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감행하는 것, 그것도 매번, 이미 알고 있는, 알면서도 하는,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거듭나는, 위대한 순간이며, 사건이다. 어쩌면, 그 실패를, 거듭, 반복하다보면, 칠흑 같던 자의식이, 조금은 투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안재홍_나를 본다_동_70(H)X40cm

 

 

안재홍은 고물상에서 피복이 벗겨진 채 뭉쳐있는 동선다발을 본다. 그리고 그 동선다발이 꼭 자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쓸모없이 버려진 동선다발과 자기의 처지를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고부터 지금까지, 그 동선다발을 취해 작업을 하는데, 꼭 자기를 만지고, 자기를 만들고, 자기를 빚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모두가 자기 자신이며, 자기분신이다.

그 분신들은 서로 어우러져서 군상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고, 숲을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숲을 일궈낸다. 사람 속에 숲이 들어있고, 숲 속에 사람들이 들어있다. 사람과 나무와 숲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에게 스며들고 녹아들면서, 유기적인 덩어리를, 그 속에 허허로운 숨구멍으로 숭숭한 덩어리를 일궈낸다(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정통적인 조각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안쪽과 바깥쪽이 막혀 있는, 정통적인 조각의 매스, 양감, 속이 꽉 찬 덩어리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통적인 선조로 보기도 어렵다. 선조에 비해, 동선다발로 뭉쳐낸, 작가의 조각은 정형화된 형식을 결여하고 있다). 사람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위한 풍경이 되는, 그 풍경 속에 또 다른 사람이 웅크리고 있거나, 서 있는, 사람과 풍경이 서로를 향해 열리고, 서로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풍경조각으로 부를 만한 한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런가하면, 동선다발이 신체를 온통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핏줄다발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하게는, 가녀린 선은 핏줄 같고, 좀 더 굵은 선(관 형태의 동 파이프를 용접해 만든)은 힘줄 같다. 드로잉조각이나 실루엣으로 나타난 사람형상과, 핏줄과 힘줄다발, 그리고 대개는,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 떠올려주는 내면화와 내재화의 경향성이 어우러져서, 신체의 바깥쪽과 안쪽,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심리의 지층을 하나로 꿰뚫고, 신체의 가시적인 형상과 비가시적인 층위를 관통해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에서 사물, 세계, 대상의 안쪽과 바깥쪽은 서로 통하면서 연속돼 있다(사람이 풍경과 통하고, 신체의 바깥쪽이 안쪽과 통하는). 그 자체를, 생태담론과 생명사상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동선다발은, 마치, 삶이 지나간 궤적과 흔적들이 오롯이 중첩된 선들의 뭉치로 남겨진 것 같다.

이로써, 안재홍의 조각은, 말하자면 작가 자신의 자화상(자소상)이면서, 동시에, 삶의 메타포로서의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자화상은, 동시에,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 자화상이 그려 보이는 삶은, 동시에,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작가가, 유독, 유별나게 겪어내고 있는 실존적 인간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자아며, 타자며,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vol. 20091202-안재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