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주 展

 

EQUINOX

 

 

 

김종영미술관

 

2009. 4. 3(금) ▶ 2009. 5. 21(목)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 453-2 | T.02-3217-6484

 

www.kimchongyung.com

 

 

Fresher Widow

 

 

EQUINOX: 의미의 질서를 역치(易置)해서 바라보기

김정락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

1. 사물과 재료에 대한 역치된 사유

무수한 사물이 인간의 거대한 욕망 속에서 쓰이고 버려진다. 유용성, 실용성, 경제성 등등의 합법화되고 때론 합리화된 인간의 욕망 속에서 사물은 그 쓰임을 마치는 순간 용도폐기된다. 쓰레기라는 개념으로 버려진 사물들은 더 이상 위에 언급한 합리주의적 시선에 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추나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극단적인 변질 속에 사물의 생명은 끝난다. 이러한 생명주기는 인간의 유용성이, 아니 그 욕망이 제도화한 현실이 되었다. 유통기간이 끝난 사물들이 담겨진 쓰레기통에서 - 이것은 사물이 잠정적으로 그 종말과정의 한 기간을 차지할 뿐이다 - 작가는 다른 생명력을 발견했다. 버려진 사물에 예술적 생기를 불어넣는 일은 박원주 만의 것은 아니었다. 마르셀 뒤샹이 그랬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작가들이 오브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물에 다른 생기를 불어넣었다. 현대 미술가들은 이처럼 죽은 사물에 예술이라는 주문을 걸어 다른 목적의 사물로 부활시켰다. 어쩌면 미술은 이러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마법이었고, 미술가들은 마법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금술을 몰래 익히고 연마하여 자신의 비밀스런 장소 (아틀리에)에서 온갖 실험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고 그 결과물들을 내어놓는다.

필자는 한번 현대 미술의 특징 중 하나로 전시적 성격을 강조했었고, 이 전시적 성격은 예술작품의 박제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논리를 전개했었다. 이것은 예술작품이 그 생명성을 잃음으로서, 즉 죽음 혹은 유사죽음의 단계에 진입하면서 비로소 작품으로 인식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뒤샹의 변기는 그 유용성을 상실한 것 - 즉 본질적인 기능이나 목적성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것은 사물의 죽음으로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하였다. 박원주의 작업은 이러한 과정을 심히 재고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졸고는 이러한 생각의 논리적 펼침에 해당한다.

 

2. 조각의 개념의 가역성

그림 2 <전기의자>부분일반적으로 조각이라는 장르는 물질과의 갈등과 마찰 그리고 극복을 전제하기 다반사다. 무겁고 단단한 돌은 물론이거니와 다루기 용이하지 않은 수많은 재료들을 다루는 기술을 섭렵하고, 또한 이것을 넘어 작가가 의도한 형상을 자유롭게 물질에 입히는 것이 조각이 가지는 난제이자 특성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의 조각도 이러한 전통적인 장르개념에서 그다지 많이 벗어나 있지는 않다. 때론 개념예술 따위로 물질적 근거를 아주 없애버리지 않는 한 그렇다. 박원주가 손에 잡은 재료는 이 장르를 바라보는 관점을 쉽게 넓혀준다. 우선의 예를 들자면 그의 종이작업이다. 설치조각인 <전기의자>는 A4용지를 사용해 만든다. 복사나 프린트용으로 쓰이는 사무용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오브제라는 개념으로 이전하였고, 동시에 작가는 '편재적 작업(ubiquotous working)'이라고 설치의 개념을 확장시켜놓았다. 종이가 가지는 가벼움 그리고 부서지기 쉬움은 또한 재료가 주는 다른 난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돌이 주는 것과는 정반대인 측면에서 파생된 어려움이다. 그리고 이 어려움은 단순히 작업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사고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데에 이른다. "힘없는 입체물을 만드는 도중 구겨지거나 망가질까봐 숨죽이고 손 떨리게 하는 예민함"은 바로 재료가 구성한 작업의 특성을 체감하게 만드는 발언이다. 하지만 그 종이작업이 형성해 놓은 이미지는 언급한 재료와 작업의 속성과는 달리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무거울 수밖에 없는 전기의자다.

 

 

희망봉

 

3. 현상학적 모순(론): "약함의 힘"

작가는 그림을 싸던 단순한 틀을 작품에 포함시키면서, 뒤샹의 작품을 연상하게 만든다. 액자는 부가적인 요소로서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작품의 레이아웃을 결정하는 중요한 핵심이 되어있다. 마치 어떤 내부의 힘에 의해 일그러진 모습들은 조각이 지닌 힘의 역학적 관계를 보여주면서 또한 의미의 역학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전에 이 작업에 대해서 <펴기 Smoothing>으로 정의하였다. 의미론적으로는 마치 뭉쳐져 있었던 것을 곧게 펼치는 작업처럼 들리지만, 가시화된 현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즉 곧은 형태가 내부로 응축해하는 인장력 따위로 인해 구겨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작가의 역설은 그가 내민 제목과 실제로 나타난 현상과의 상반된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어쩌면 작가의 의도적인 역설은 예술이 지닌 본질적 성격을 대변해 준다.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호도하는 예술에서 그 모순관계를 노출하는 예술로서 이미 현대미술은 자신의 역설적 성격(혹은 내재된 가역성)을 폭로하는 일을 드물지 않게 수행했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는 현대미술의 경향성을 잘 이해하고 자신 또한 그런 노정 위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로드맵은 서양현대미술의 길 위에 또 다른 의미의 루트를 통해 겹쳐져 있다. 그 루트는 일종의 패러디 혹은 동어반복적인 방식으로 보이지만, 그 진의는 약간 다른 것 같다. 마르셀 뒤샹의 <Fresh Widow>(1920)를 연상하게 만드는 작품인 <Fresher Widow >이 우선 그런 예증이 된다. 막막한 8개의 검은 창을 보여주는 뒤샹의 창틀은 예술의 새로운 정의나 선언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창은 근세 이후 창문의 개념으로 이해되었던 회화의 존재성을 부인하고, 그것이 지닌 미니어처 크기는(이 작품은 60cm의 높이를 지닌다) 실용적 기능과 레디메이드에 대한 기대도 저버린다. 또한 창틀의 지지대에 쓰인 "Copyright Rose Selavy, 1920"은 이 작품이 마치 다른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그 원작성(Originality)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그 이름에서도 "Eros, c'est la vie"처럼 들리게 하여, 일종의 성(性)적인 환상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는다. 또한 실수나 장난처럼 보이는 작품의 이름 또한 창(window)이 아니라 과부(widow)이다. 오브제에 대한 인격화는 문이 지닌 여성적 코드를 우의적인 방식으로 접목한 결과라고 부를 수 있겠다. 박원주 작가의 대응은 꽃분홍색을 가진 구겨진 창틀이다. 그리고 작가는 뒤샹의 창문보다 더 신선한 창문이라는 사실을 제목을 통해 알려준다. 이제 우리는 뒤샹과 박원주의 작품을 저울질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후자는 오히려 뒤샹의 막힌 창을 열어 그의 은밀한 코드를 해체하고, 창틀과 창문을 함께 구겨서 작품 자체가 지닌 내적 역학을 보여줌으로서 뒤샹의 의미론적 폐쇄성을 상쇄시켜버린다. 그러므로 박원주의 작품은 패러디의 형식을 - 패러디야말로 뒤샹의 전매특허였다 - 뛰어 넘어 등가적인 가치를 지닌 예술작품이 되게 하였다. 이것에 상응하여 작가는 "균형 잡힌 긴장(balanced tension)"이라고 작품의 위치를 정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작가는 루시오 폰타나의 찢긴 화면을 <칼날 삼부작 Blade Trilogy>로 미술사적 저울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폰타나가 평면에 그은 칼자국으로 인해 남성적(혹은 폭력적)으로 현대회화가 추구했던 원리적 이상을 초극하는 것이라면, 작가는 이것을 액자에 담아 보듬고, 또한 일그러진 조형으로 제시함으로서 그 이상에 대한 감성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런 미술사적 현상을 담아내는 작가의 감수성은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남겨놓은 '위대한' 행위에 대해 작가 자신의 사적인 상상력을그림 4 <Fresher Widow > 대비함으로서 균형을그림 3 <펴기 Smoothing> 잡는다.

 

4.미시성에서 찾은 거대한 의미들

단순하고 흔하디흔한 종이 한 장에서 무거운 의미를 형상화한 <전기의자>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미미한 사물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만들고 연출하는 속에서 거시적인 의미의 지층을 쌓아 올린다. <무쇠와 같은 마음 Heart of Iron>이나 <월광주기표 Lunatic Phase Diagram>과 같은 작품에서 관념적으로 흔한 사랑과 강박 그리고 의심과 확신의 변주와 긴장 그리고 갈등관계를 형상화 하였다. 그리고 그 형상화들은 어렵지 않게, 그러니까 복잡한 사고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서도 이해될 만한 이미지로서 제시된다. 그만큼 작가의 언사는 그 관념이나 사물처럼 미시적이지만, 그 언사가 지닌 의미는 무한 확대가 가능한 것이 된다. 그리고 개념과 의미의 확대는 모순이나 가역성을 촉매로 해서 가속화될 수 있다. 작가라는 개인과 그 사적 영역에서 출발하는 사유는 점차 사회적인 지평 속에서 각 부분을 차지하며 평형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평형에 작가는 추분과 춘분을 의미하는 라틴어인 "Equinox"'라는 용어를 붙였다. 일 년에 딱 두 번 밖에 없는 낮과 밤의 길이가 일치는 순간, 어쩌면 그의 조각이 완결되어지고 지속적인 현상이나 상태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기다려지고 혹은 금방 지나간 순간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세 개의 미니어처로 이루어진 <희망봉>에서 "확신을 종용받고 있는 의심과 의심을 종용받고 있는 확신"이라는 순간적이고 가역적인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으며, <구름 1, 2, 3>에서도 역시 찰나적인 현상이 작품 속에서 박제되어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춘추분 사이>는 크롬도금을 한 머그컵에 무쇠장미가 꽂혀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가리켜 잠시간의 휴식(coffee-break)라고 하였다. 순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과 관심은 사물이 지닌 물리적 속성의 상반성에 기대어 더욱 강조되는 형국이다. 굳어버린 순간에 대해 작가는 "세상에는 tension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라고 대답한다. 결국 극단적인 대치로서의 평정이 아니라 중간 어디쯤에서의 편안하고 안정된 순간이 작가가 바라던 사유의 도착지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펼쳐놓은 예증들은 작가가 외부, 사물 그리고 예술작업에 관련하는 그의 모순론에 입각한 작품론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론의 중심에는 현상학적 이중성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는 발전된 양태를 보여준다. "대수롭지 않은 종이 한 장"에서 시작된 예술사유는 액자작업에 이르렀다. 쭈그러지고 울퉁불퉁한 액자는 이전 종이작업이 겨우 견디어 온 형상물과는 달리 단단하다고 믿었던 물질들이 쉽게 붕괴되어 나가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런데 작가는 이번 전시에 "Equinox"라는 이름을 걸었다. 현상과 텍스트 그리고 형상과 질료 사이에 이 부인할 수 없는 모순적 관계는 작품이 내포하고 보여줄 내용이다. 하지만 작가는 대치된 속성과 개념의 갈등이 순간적으로나마 해소되는 지점을 찾으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작품에서 작가의 확신과 더불어 약간은 우울한 기대감에 젖어볼 수 있겠다.

 
 

 

 
 

vol.20090403-박원주 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