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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복종 - 정상현 展
Smoke_시간 : 00:03:50_싱글채널비디오_2008
갤러리 팩토리
2008. 12. 5(금) ▶ 2008. 12. 28(일) Openning : 2008. 12. 5(금) Pm 6:00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 127-3 110-034 | T.02-733-4883
Smoke_시간 : 00:04:50_12채널비디오_2008
히키코모리, 밀실의 생리학(병리학?) - 고충환(Kho,Chung-Hwan)
나에겐 자신만을 위한 밀실이 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잠시 기거했던 자궁 속처럼 적당한 물기와 정적과 어둠을 머금은 그곳에서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져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따금씩 소외감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대개는 만족스럽다. 세상과 동떨어져 있으면 무엇보다 자신을 세상과 비교할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나는 완전하게(그런데, 완전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기꺼이 자신 속에 빠져든다. 밀실에는 작은 들창이 나 있는데, 이것이 세상을 향한 유일한 창이다. 하지만 그 들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세상의 정보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지엽적인 것이어서(더욱이 밀실에 홀로 오래 있다 보면 내가 보는 것이 과연 세상풍경이 맞는지 혼돈스러울 때도 있다), 그 대부분의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우곤 한다. 나아가 나는 아예 자신만의 세상을 짓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나는 그 밀실을 나만의 작업실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의 밀실에서의 작업이란, 들창을 통해 얻은 세상의 정보를 숙주 삼아, 이에다가 순수한(그런데, 순수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상상력과 꿈과 욕망을 버무리는 일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밀실은 나를 위해 기꺼이 극장이 되고 무대가 된다. 때론 갤러리로 탈바꿈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페티시(공간 자체가 성기)로 변신할 때도 있다.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으니 얼마간 우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이 나만의 놀이공간에서 나는 가끔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는 거다. 이는 들창 밖의 조각난 풍경들보다는 오히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들 때문인데(많은 경우에 있어서 소리는 알 수 없는 풍경보다 더 폭력적인데, 그것은 소리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며, 이로 인해 불안감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밀실이 무슨 외계인(외계인이란 무슨 별에서 온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엄밀하게는 나와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사람, 해서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의 침입을 받아 폭삭 내려앉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로써 무엇보다도 자신이 세상에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다. 그럴 때면 자궁처럼 안온하고 친근했던 밀실이 불현듯 낯설고 생경해진다. 흡사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력으로 생장하고 진화하는 유기(체)적 감옥으로 변신한다. 그렇게 스스로 즐기기조차 했던 소외감에 상상력에 덧대어져 불안감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으로 부풀려지고 팽팽해지는 것이다.
Smoke_시간 : 00:04:50_12채널비디오_2008
정상현의 작업은 밀실 애호증과 공포증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런데 이 두 징후는 밀실 자체의 속성 속에 이미 내재돼 있던 것이다. 밀실은 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은신처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가두고 격리시키는 감옥이다. 밀실이 은신처일 때 그것은 안온하고 자족적인 공간이 되고, 밀실이 감옥일 때 그것은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인 공간이 된다. 그런데 은신처로서의 밀실과 감옥으로서의 밀실이 서로 별개의 공간이 아닌 하나의 공간이란 거다. 은신처 속에 감옥이, 감옥 속에 은신처가 서로 잠재적인 형태로 내포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밀실의 이런 이중적 공간이 다중적 공간으로 걷잡을 수 없이 분절되고 부풀려지면서, 서로 긴밀하게 직조된 망구조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공간 스스로 생장하고 진화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어디가 은신처고 어디가 감옥인지에 대한 구분과 경계에 대한 논의가 무색해져버린다. 사람들은 밀실을 꿈꾸면서 동시에 기피한다. 이는 일종의 거리감이나 밀도와 관련된 것으로서, 사람들 속에 있으면 불편해지고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진다. 이런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분열적 징후로부터 삶의 아이러니, 이율배반, 부조리의식이 싹튼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예술가들은 이렇듯 밀실로 비유되는 (심리적) 공간구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다(심지어 모든 예술가들은 어느 정도 이러한 밀실의식을 내재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와 이율배반과 부조리 같은 존재론적 조건이나 자의식을 도구로 해서, 이 (삶이라는 이름의) 공간구조를 재현하고 해석한다. 정상현의 작업은 이러한 밀실의식과 공간구조를 주제화한 경우로서, 그 주제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 모두의 주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인) 보편성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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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현의 작업은 자신만의 고유한 밀실을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미니어처 무대세트 같은 그 구조물은 상황에 따라서 작업실, 빈 방이나 실내, 극장이나 무대로 다변화된다. 이 휴대용 무대세트 안쪽에는 작은 문이나 창문이 나 있으며, 때로 그 구멍은 영상을 투사하는 스크린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작가는 일종의 가상공간을 재현한 이 정교하게 만든 구조물을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도로가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거리에다 설치한다. 그리고 구조물의 열려진 전면을 통해 보이는 광경을 비디오로 기록한다. 이로써 무대세트로 재현된 가상공간과 무대세트에 난 구멍을 통해 보이는 현실공간이 겹쳐보이게 한 것이다. 여기서 무대세트는 비록 가상공간으로써 재현된 것이지만, 정작 이를 통해 보이는 광경은 흡사 방안의 창문에서 바깥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은 현실감을 준다. 문을 통해 내다보이는 영상이 불현듯 가상공간을 현실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상공간에다 현실감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론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의 경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투명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러한 현실감은 비주얼과 함께 소리와 움직임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이를테면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그 진동에 의해서 세트 내부의 소품들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세트가 자동차에 치여 파괴되는 순간에 이르면, 가상공간과 현실공간, 가공된 상황과 실제상황과의 경계는 더 불투명해진다.
한편, 작가는 역으로 현실공간으로부터 현실감을 박탈함으로써도 가상공간과 현실공간과의 불투명한 경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무대세트 안쪽에 난 창문을 통해 사계절의 풍경이나 명승지의 절경이 펼쳐지는데, 실은 그 풍경이 달력임이 드러난다. 무대세트를 달력 앞에다 놓고, 손으로 달력을 찢어 장면을 전환시킨 것이다. 이때 모기향을 피워 안개를 연출하거나, 무슨 가루 같은 것을 흩뿌려 눈 오는 장면을 연출하는 등 실재감을 흉내 내지만, 이로 인해 현실감은 오히려 더 모호해진다. 이외에도 통로를 따라 보이는 회랑이며 벽에 걸린 그림들이 사실은 전시도록에 실린 사진을 비디오로 기록한 것임이 판명되는 등 작가의 작업 중에는 현실과 가상, 실제상황과 허구적 상황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 침투시키는 작업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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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련의 작업들에서 가공의 무대세트는 사실상의 눈(시선)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이때 무대세트가 화면에 꽉 차도록 풀 사이즈로 장면을 설정하는데서 착시효과가 극대화된다. 가공된 현실을 실제상황과 비교할 수 있는 관계의 망을 단절시킴으로써 실제의 눈으로 사물을 볼 때와 유사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눈은 무대세트와 동격이 되고, 밀실과 동질의 것으로 나타난다. 밀실에서, 밀실을 통해서, 밀실을 프리즘 삼아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때 밀실은 주체와 주체의 관점을 암시한다. 주체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관점을 통할 때 단단한 세상도 물렁해 보이고, 편평한 지평도 주름져 보이며, 무엇보다도 모든 견고했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혼입되며 재편된다. 관점을 객관화한다는 것(주체로부터 세상을 보는 프리즘을 걷어낸다는 것)은 이론적으론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여하한 경우에도 나는 너와는 다른 관점과, 차이 나는 인문학적 전망의 소유자임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아마도 예술은 이런 차이가 더 뚜렷해지는 계기이지 않을까).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가 투명해진다는 것(주체감이 투명해진다는 것이지, 그렇다고 주체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은 즉 심리적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의식 내지는 인식론과 더불어 작가의 작업에서 밀실이 갖는 의미는 더 강조된다. 밀실의식은 안온한 공간에서보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자아내는 낯설고 생경하고 이질적인 공간에서 더 뚜렷하게 부각되는 법이다(존재감 역시 이럴 때 더 선명해진다). 이로써 작가는 밀실이 외계인의 침입으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 불안감은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상상력을 요구하고, 이로 인해 밀실과 바깥세상, 가상현실과 현실, 가공된 상황과 실제상황 간의 경계가 걷잡을 수 없이 모호해지고 지워지고 뒤섞인다. 자기만의 세상을 보호해주고 감싸주던 밀실이 무너져 내리면서, 이제까진 창문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접해왔던 외계(바깥세상) 전체가 육박해오며 그 괴물성을 드러낸 것이다. 그 괴물성은 밀실을 낯설게 만들고 밀실을 공격하며 마침내 밀실을 자기의 것으로 접수하기에 이른다. 해서, 주인을 잃은 밀실은 스스로 생장하고 진화하는, 불현듯 사라졌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출현하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거주하는 자족적인 공간, 유기(체)적 공간, 불가항력적인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로써 정상현은 아무 때나 꽃이 피고 시절 없이 눈이 내리는 무책임한 계절처럼, 정작 세상은 아름답지가 않은데 사시사철 세상의 아름다움을 광고하는 달력그림처럼 세상은 처음부터 알 수 없는 기호들의 전장이었음을 주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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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081205-모호한 복종 - 정상현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