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숙 展

 

- 바다, 청색에 물들다 -

 

윤명숙-001

 

 

갤러리 라메르

 

2008. 11. 19(수) ▶ 2008. 11. 25(화)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94 홍익빌딩 3F | 02-730-5454

 

www.galleryLAMER.com

 

 

윤명숙-007

 

 

‘윤명숙의 바다사진’     

 

박영택 |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남양주 어디쯤, 자연속에 들어와 박힌 집/작업실에서 바다를 보았다. 거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높이로 쌓인, A4용지 한 장 크기의 비닐에 담긴 슬라이드필름 속에서 무수한 바다, 그러나 한결같은 바다이면서도 너무 현란한 바다를 만끽했다. 작가는 그렇게 바다를 사진에 박아왔다. 바다의 시간을 기록했다. 누구보다도 바다를 많이, 오랫동안 응시했을 것이다. 문득 일본영화 ‘안경’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멍하니, 침묵으로 절여진 상태에서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던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과 눈이 이 작가의 눈이나 마음과 그리 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위와 목적, 이성과 합리성으로 조율되던 현실계에서 풀려난 사람들이 바다에 모여 어떠한 욕망과 목적, 인위를 거부하면서 그저 바다를 보는 순간에 빠져드는 몽황적인 시간을 흘려보내는 장면이다. 바다는 사람들을 간섭하거나 강요하거나 보채지 않는다. 그저 까마득한 세월, 그 자리에 와서 보고 있는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헤아리기 힘든 시간을 한결같이 뒤척이고 흐르면서 그렇게 자리해있는 무심한 존재다.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고 이를 사진으로 담는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에 그럴 것이다. 사실 바다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무를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내면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에 도착한다. 세속의 끝자리에, 삶의 마지막 경계에 바다는 처연하게 드러누워있다. 떠나온 자들은 무엇보다도 바다를 본다. 어디에선가 떠나온 자신의 절대적인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기에 그럴 것이다. 윤명숙의 사진은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에서 건져올려진 비릿하게 파득거리는 날 것으로서의 신선한 풍경을 보여준다. 작가는 바다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한다.

“바다는 그저 자기 모습만 보여 주고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바다 모습을 본다. 나와 바다는 그런 사이다.”(작가노트)

 바다를 사진으로 촬영하겠다는 의지나 욕망이기 전에 그냥 바라본 상태에서 부득이 나온 사진이다. 좀 역설적이지만 바다에 가서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랜시간 보내다가 어느 순간 그 바다가 변이를 일으키는 상황,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뒤집어지는 순간’을 잡아채 온 것이다. 그리고는 바다를 등졌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현실과의 불화나 세상과의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바다에 와서 지워나가는 한편 돌변하는 기후의 변화나 바다와 하늘의 격렬하고 장엄하게 급변하는 상황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나 대리만족을 경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귀환하는지도 모르겠다. 해서 바다 앞에서 보낸 시간과 마음에 종지부를 찍고 돌아나오는 길에 ‘콱’하고 들어와 박힌 바다/하늘의 순간을 저장하고 빠져나온다.

 

 

윤명숙-010

 

 

표면적으로는 바다의 여러 표정, 자연계의 놀랍고 신비스러운 변화에 대한 감동을 촬영했다. 간혹 섬이나 새들이 등장하지만 대부분 하늘과 바다, 물 뿐이다. 눈과 마음이 본 것을 기록했다. 그러니까 비가오거나 눈이 내리는 바다, 형언하기 어려운 구름과 색상으로 가득한 하늘, 인간의 언어와 문자가 수식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변화무쌍함을 사진을 가까스로 건져올렸다.  그러나 그 사진이 그 순간을 온전히 기억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 바다사진은 그 순간을 저장하지만 이내 다음 사진으로 옮겨다니면서 표현할 수 없다는 자괴감과 그것과 함께 보낸 기억을 간직하고 저장하겠다는 부질없음 사이에서 길항한다. 일반적인 풍경적 ‘씬’과 ‘프레임’을 통해 바다이미지를 재현하지만 그 재현은 지연되면서 다음 바다사진으로 하염없이 넘어간다. 여전히 작가가 바다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마치 옛선비들이 군자의 세계를 지향하면서 속세와의 마찰을 견뎌내면서, 수신과 수행의 차원에서 평생 반복해 긋던 사군자 처럼 기회만 되면 바다로 달려가 하루종일 그 자리에 앉아 바다를 응시하고 자신을 다독거리고 정화시키고 치유해서 돌아오는 것 같다. 그것은 익숙하게 보아온 바다임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마주하게 하는 바다의 낯선 초상이다. 사진은 늘 익숙한 풍경을 거짓없이 보여주는 재현적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진은 매번 당혹감과 생경함으로 익숙함을 배반하는 힘을 지녔다. 그는 새삼스럽게 바다를 다시 한번 우리 눈앞에 아름답게 인식시켜준다. 결국 그것이 이미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작가의 관심은 재현대상 그 자체라기 보다는 빛 자체인 듯도 하다. 빛에 의해 바다풍경은 고정되어 본 적이 없다. 자연은 늘 그렇게 변화무쌍하다. 당연히 바다는 고정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다는 헤아릴 수 없다는 데 그 매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실측과 시측의 경계에서 훌쩍 벗어나 있다. 자연은 늘 변화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없다. 하물며 시체도 맹렬하게 변화한다. 지상의 모든 것들은 완벽한 소멸의 지점을 향해 미친듯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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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에의 의지를 거느리고 무거운 질량과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로 뒤척이는 바다의 수압이 인화지 표면에 밀착되어 있다. 바다는 스스로 하나의 선을 만들고 그 가물한 경계에 하늘이 맞물려있다. 바다는 늘 하늘을 동반한다. 바다가 밀어낸 자리에 하늘이 있고 하늘이 보이는 자리에 바다는 멈춰있다. 바다사진이면서 동시에 그것은 하늘사진이다. 그러니까 바다와 하늘은 늘 한쌍으로 맞물려있다. 결국 바다를 찍는다는 것은 그 바다를 둘러싼 환경을 응시한다. 그녀는 바다를 편애한다. 사진 안에는 사계절의 바다와 하루동안의 바다가 있다. 탁 트인 바다는 누구나가 가보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육지를 떠나 그 마지막 바깥에 자리한 장소에 이르러 탄식처럼 바다를 소리내 부른다. 그녀는 바닷가에 가서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어느 순간을 기다린다. 비가 내리다 그친 후 혹은 급격한 기후변화가 거쳐간 자리에 문득 돌변한 상황, 앞서 언급했듯이 ‘확 뒤집혀진 상황’을 기다린다. 그러한 기후의 변화와 반전의 상황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곳은 바다다. 바다는 늘 수평으로 자리하고 평화롭고 처연하게 드러누워 있지만 매 순간 급변하는 곳이다. 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장소다. 따라서 바다는 여전히 주술적인 장소다. 그것은 인위와 과학과 이성으로는 설명되고 가늠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그 알 수 없음, 예측 불가능함이 더없이 매혹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작가는 바다에서 그걸 절감한다. 바다는 우리를 온전한 무無로 돌려보낸다. 바다에서 돌아온 자의 얼굴에 묻은 짭짤한 바다내음과 바람과 태양의 흔적이 부러운 이유다.

 
 

 

 
 

vol. 20081119-윤명숙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