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효 기획展

 

-채움과 비움-

 

그리움_136×66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색,자개,옻칠_2006

 

 

선화랑

 

2008. 5. 28(수) ▶ 2008. 6. 13(금)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184 선화랑 1~3층| 02-734-0458

 

www.suncontemporary.com

 

 

매화_136×66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색,옻칠_2007

 

 

'비움과 채움'의 변증적 미학

 

이재언 | 미술평론

  복잡하고 각박하며, 정보와 소음으로 온통 뒤덮인 오늘의 도시적 일상이란 사색과 관조의 여유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황량한 지경이 되었다. 그야말로 인간이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고립시키는 분열과 불안의 상황이 가중되는 극단적인 정신적 공황에 직면해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인식과 자각으로 말미암아 우리 동시대인의 정서구조나 미의식은 무언가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것으로의 복고 자체를 희구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진단되곤 한다. 자연, 신화를 더욱 진지하게 추구하고 성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술의 형식을 보다 단순하고 품격 있게 절제된 형식으로 정제해내는 동양적 미의식을 재해석하는 시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단순함이란 복잡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는 동시대 정서에 보다 간명하고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상호 소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절제된 단순함이 반드시 쉽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가들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인상적이고도 강렬한 경험을 촉발하는 경우는 대체로 단순함이란 '비움'이면서도 '없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닌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임효는 우리 화단의 은자라 불릴 정도로 고독하게 그림으로 수행하는 작가이다. 임효는 한국화 화단의 메인스트림에서 무기교의 미학과 선(禪)의 아우라를 폭넓게 추구하는 독특한 화풍의 소유자이다. 작가는 초기 화선지 위에 호방한 수묵의 필력을 뿜어내는 추상화면을 일구어내다가, 90년대 들어 직접 닥종이 수제 화폭을 만들어 부조적이고 삽화적인 간결한 그림을 그려왔다. 작가의 그림은 수행과도 같은 종이 만들기 과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육질이 두터운 지판이 만들어지면 작가의 그리기는 종이 만들기 과정에 비해 의외로 단조롭고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려진 형태들 역시 어떤 완결의 의미보다는 아직도 그려지고 있는 듯한 어딘지 미완인 것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곤 하다.

 

 

명상_54×41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색,옻칠_2008

 

 

  작가의 화면은 정말이지 단조롭기가 그지없다. 텅빈 화면에 여백만 잔뜩 남긴 삽화와도 같은 단조로움과 가벼움까지도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화면이 결코 가볍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수제 종이의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수제 종이는 여백도 무언가 잡다한 세상의 소음들을 빨아들여 무화시킨 것처럼 조용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 화선지와는 다른 두터운 재질과 투박한 표면이 텅 빈 여백 자체를,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무언가 있음직한' 잠재적 공간으로 읽을 만한 아우라가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자주 하는 이야기지만 작가의 그림은 종이를 만드는 과정 자체로 이미 반 이상은 완성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가 오랜 세월 작업을 해오면서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가 바로 노장의 변증론적 존재론과 불가의 윤회 혹은 원환의 변증론이다. 모든 삼라만상과 세계의 현상들이 대립적이면서도 상호 순환과 연속성을 갖는다는 작가의 변증적 세계관이 화면들마다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작가가 그리는 이미지는 곧 여백이며, 텅 빈 여백 역시 단순한 없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세계관을 현학적인 기호나 도상들로 담는 것이 아니라 휴머니티와 인간미가 은근히 풍겨지는 문맥으로 순화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이 노송 아래 정자에 홀로 앉아 가부좌를 튼 선승의 마음을 흔드는 장면의 그림이야말로 단조로우면서도 정감 넘치게 표현하는 임효 화풍의 정수이다. 그림 속의 점경인물이 바로 작가 자신인지도 모른다. 큰 붓으로 툭툭 건드린 듯한 투박하고 단조로운 형태들은 삽화풍이면서도, 인간적인 정취와 순발력 넘치는 휴머니티를 함께 전하면서 볼수록 생각에 빠지게 하는 도상들이 아닐 수 없다.

 

 

비밀의정원_60×45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색,옻칠_2008

 

 

  최근 들어 작가의 그림들은 좀 달라지고 있다. 우선 종래의 은유성이 짙은 수묵 담채의 화면에서 벗어나 강렬한 원색이 많이 구사되고 있으며, 다양한 추상적 구성이나 패턴들이 빈번하게 출몰하고 있다. 원색의 채색들은 병행되는 수묵으로 인해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고, 또한 종래에는 거의 종이 재질 자체의 물성 노출을 거두고, 여백까지도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이라면 보다 다양한 화풍의 레퍼터리가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의 선승 시리즈 말고도 매화, 사각정원 등의 상이한 화풍의 그림들이 고루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모노크롬의 단조로운 화면 구성이 주류를 이루는 추상적 화면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닫힌 의미로서의 재현 이미지, 열린 의미로서의 추상 이미지라는 이분법이 작가에게는 그리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들이 서로 연속되고 상호작용하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비움과 채움의 변증적 순환을 모토로 한 미학이 가장 간명하게 드러나는 양식이 아닐까 싶다.  

 

 

사각정원_106×75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옻칠_2007

 

 

“채움과 비움”에 대하여

 

임효

                      

나의작품에 나타나는 자연, 시간, 생성과 상생의 궁극적 목적은 무아(無我)로 집약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궁극적인 무아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할 경계는 바로 공(空)이고 . 그것이 비움과 채움의 시간인 것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

일체의 모든 만물은 공하여 크다 작다가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는 것 또한 없음이라 이는 生과 死 또한 모두가 공한 것이니 시간을 집행하는 신의 영역에서 보면 채움 또한 공 한 것이니 있다 없다가 모두 한 경계에 이르는 것이다.

 

 비움은 채움으로 가기 위한 시간이고,

채움은 비움으로 가기 위한 시간으로

비움과 채움은 서로를 향하는 몸짓......

서로를 향하는 그리움.......

그래서 역설적인 동질성이 느껴지는 것.

채우기 위해 비우고 비우기 위해 채움을 반복하는 시간들

 

 

열망_214×151cm_수제종이위에 먹과 채색,옻칠_2006

 

 

지현 스님은 ‘여백의 미’라는 글에서 ‘꽉 차지 않고 조금 비어 있는 듯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고유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 그는 ‘여백의 미는 산수화나 풍류를 즐기는 삶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 안쪽에 자리 잡은, 서두르지 않고 넘치지 않는 여유로움에서 비롯한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하는 욕망,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탐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면 끝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고 충고했다.

그런 것들을 그림을 통해 묵시하고 형과 의미를 통해 삶의 색을 정화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해 주고자 한다. 그림 속에서 비움은 다른 것을 채우고 변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의미를 맛보게 될 것이며 채움 속에서 비움의 미학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맛보게 될 것이다.

장구의 통이 비워져 있기에 소리가 나고 목탁이 채워져 있다면 소리가 나겠는가? 비워져있기에 나는 소리! 그것이 본인작품에 나타나는 향기이며 소리이다.

 

 

정원_88×64cm_수제종이위에 먹과채색,옻칠_2007

 

 

비움의 미학을 칭송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채움의 진정성을 말하는 이는 드물다. 그러나 채움의 긍정성은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무언가를 가득 차게 한다는 뜻으로 우리는 흔히 ‘충만’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비움의 아름다움은 충만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는 벼로 가득 찬 들판, 만삭의 부인들, 꽉 찬 돼지저금통 등 충만한 것들을 보면서 채움의 기쁨을 느낀다. 산스크리트 어에는 공(空), 즉 비어 있음을 뜻하는 ‘수냐타’라는 단어가 있다. ‘수냐타’의 원래 뜻은 ‘없음’이 아니라고 한다. ‘수냐타’는 애초 충만, 가득 참을 의미했다. 너무나 충만하기 때문에 더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 것이다. 채움과 비움은 역설적이지만 동질성이 있다. 비움은 채움의 또 다른 모습이다. 충만의 미학은 절제와 침묵의 미학인 동시에 무한의 표현이다. 무언가를 채울 때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을 받아들일 것인가 선택해야 하고 비울 무엇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우리의 삶 역시 비움과 채움의 연속...

그래서 존재가치보다 소유가치의 의미가 더해가는 시간 속에서 채우기 급급한 우리들 마음이 비우고사는 지혜를 터득 한다면 존재의 의미가 더욱 커지리라 생각한다.

 
 

 

 
 

vol. 20080528-임효 기획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