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샤오린 展

 

心性佛_260x80cm_Oil on canvas 2007

 

 

갤러리아트사이드

 

2008. 3. 12(수) ▶ 2008. 4. 1(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70 | 82-02-725-1020

 

www.artside.net

 

 

心性佛_300x200cm_Oil on canvas 2006

 

 

런샤오린의 繪畵, 몽환적 색채주의

 

작가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적 언어로 작품세계를 만들어가는 런샤오린(任小林)의 작품은 중국 옛 문인화를 연상하듯 세상에 구애 받지 않는 자유롭고 서정적인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그의 상념은 모든 존재에는 신의 사랑, 신의 형적(形迹)이 내재한다는 것에서 온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보다는 비정형적 이미지와 몽환적인 화면은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런샤오린의 의지를 담고 있다. 그의 그림은 일상생활과 초현실적 세계가 혼돈되어 시적(詩的) 몽상으로 표현되고 작가의 수많은 생각들을 심리적 표상으로 기록하여, 피자연과 인간의 유기적인 생성과정을 들어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이다. 오랫동안 그는 이전에 경험했던 느낌을 추억하며 색채와 형태로 정감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내면에 투영된 자연의 그림자, 그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언의 흔들림, 인간과 자연의 은밀한 속삭임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 또한 그는 독창적인 채색법을 발전시켜 빛을 바랜 듯, 신비한 색채를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런샤오린이 발견한 것은 색과 선의 변형에 대한 자율적인 가치였다. 그의 작품에서는 음악적 선율과 사랑이 흐르고 있다. 백일몽(白日夢)과 색채가 넘쳐흐르는 환상으로 그는 자신의 상상을 확장시키고 있는데 이러한 자유로움은 그가 자란 구이양(貴陽)이란 고향의 추억과 기억 속에 남은 중국 전통화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회화는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화면의 단조로운 요소에서 그는 다른 관찰과 접근으로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이지적이고 감성적인 화면 속에 전통적이라고 평가되는 남방의 옛 문인화의 양식과 소재의 표현이 보여 지는 것이다.  

“예술창작가의 심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이는 그림 속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평온한 마음가짐은 일종의 흉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인생경지이다.”  

평론가 펑보이(馮博一)는 그의 화면을 회화적으로는 평면적 처리와 색채에 있어서는 평범하고 부드러운 묘사로 일종의 시적인 환각과 자유로운 상태를 표현하는 것 같다면서 화면 속의 시대가 과거인지 현재인지 불분명한, 그 모호함이 매력적이라 말한다. 특히 최근에 런샤오린은 “몽환적 시적정취”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의 “애매함”과 “알 수 없음”을 회화적 표현하는데 보다 적극적이라고 했다.  

런샤오린의 예술세계는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상처를 포옹하는 영역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적 인간은 우리들의 원초적 삶, 인간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인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참다운 자아를 발견하고 우리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는듯한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것도 런샤오린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그의 자유의지와 함께 환상에 가득 찬 몽환적 색채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색채의 묘미를 살리고 형체의 진미를 상실하지 않은 그의 회화는,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매력을 보여주며, 일체의 자기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의 마음을 모호하나 환한 빛과 함께 발하고 있다.

-원애경(아트싸이드)

 

 

自我的風水 (1)_260x80cm_Oil on canvas 2007

 

 

백일몽

 

-임소림의 신작에 관하여-

풍박일

 

 1998년 임소림은 북경국제예원미술관에서 한차례의 미전을 가졌는데 나는 그 당시 미전 명을 "잠재 표현" 이라고 달았다. 그 당시 그의 생활, 창작은 주요하게 귀양에서 진행되었고 대도시의 혼잡함과 모든 예술 사조와 주류예술 영상을 멀리했고 환경은 상대적으로 밀폐됐으며 온종일 아무런 잡념도 없이 그림만 그렸다. "장성 표현"이라고 미전명을 단 이유는 바로 그가 이런 도시의 가장자리에서 생활하여 주류 사회와 멀리한 생활형태이기 때문이고 또한 그의 작품이 현재 전통적인 도덕 이념에 의해 금지되고 있는 인간의 성과 성행위를 표현했고 동시에 현실사회의 생활 본래의 형태에 대한 잠재 비평을 표현했다.

 

   현재 7년이 지났고 소림도 귀양에서부터 북경으로 "떠돌아"왔으며 화가촌의 일부 화가 동료들과 학생들과 함께 어울렸다. 그가 처음 2000년에 북경에 와서 정착할 때가 생각난다. 분명하게 이 환경에 익숙하지 않음을 느꼈는데 생활방식 상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문제였다. 생활환경의 변화는 당연히 작품 창작의 이념과 언어 표현 방식을 변화시키게 되어 있고 이로 인해 소림은 꽤 오랫동안 곤혹에 빠졌고 그 동안 우리는 계속적으로 연락을 가졌으며 예술이라는 화제도 논해 봤지만 적응하고 조절을 거쳐 마음의 온정을 가져오는 것은 필경 일정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시종 일부 예술가들의 생활 형태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였고 또 일부 예술가들이 시장의 사랑을 받은 후의 생활 형태에 대하여 곤혹과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원인은 일부 예술가들은 작품 중에 폭로, 비판, 풍자하는 것들은 바로 그들이 현실생활 속에서 향유할 수 없는 물건들이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명의 하에 사회 변혁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와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 하였고 동시에 이는 또한 이 변혁 과정의 수익자였지만 정의적 화가의 사회적 의무를 망각했고 독립적 사고와 비판적 입장과 태도가 부족했다. 덧붙여 나의 의식은 이상주의 우토방 색채를 너무 많이 띠였을 수도 있지만 예술가들은 바로 그런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고 그들의 예술 작품과 그들의 생활방식을 동등하게 평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임소림의 북경에 온 후의 생활방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록 그도 북경의 협소한 생활 속의 일원이었지만 평정하지 않은 생활과 창작 속에서 뜻대로 소탈함을 보여주었고 이런 뜻대로 소탈함은 인생의 고난과 불운을 거친 후 터득하여 승화한 것이 아니라 그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일종의 맑고 투명함이었기 때문에 진실되고 직접적이고 홀가분하게 아무런 숨김도 없다. 그는 일부 소위 성공했다는 예술가들의 생활상에서의 영락이 없으며 예술상에서의 계속적인 복사가 없고 또한 세속 면에서의 일부 예술가들의 의미심장하고 과분하며 초조함으로 하여 교활한 수법을 채용하지 않고 다만 생활의 기본 감정으로 생활을 관찰하여 내면의 풍경을 기록하여 침착하게 성급하지 않게 그림을 그린다. 이런 상황을 나는 당시 조급하고 성급한 예술계 내에 존재하고 있는 극히 귀중한 존재라고 본다. 내가 판단하기에 한 예술창작가의 심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이는 그림 속에 직접적으로 반영된다. 평온한 마음가짐은 일종의 흉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인생 경지이다.

 

 

自我的風水 (2)_260x80cm_Oil on canvas 2007

 

 

   이로 볼 때 임소림은 1998년 이전의 창작은 잠재적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생활환경과 심경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근 2년 동안 그의 예술은 일관적인 작품 속의 "지성상의 분실"을 주제로 함과 현실을 상대로 한 주제를 계승하고 또한 구체적의 감정과 극적인 결과를 멀리 했으며 일종의 "익숙한 낯선 사람"의 경지로 승화했다.

 

   여기서 말하는 "익숙한"은 현 사회 현실 속의 사람들의 생활형태에 비롯하며 중국 고대 위진 시대 죽림칠걸 중의 원적, 기강류의 "방탕", 이런 문인의 방탕은 황당무계라는 뜻도 추가되었다. 그들은 정신적 자유를 추구 했고 인격상의 비범초월을 갈망했고 형태에 구속되지 않음을 추구했다. 방탕은 일종의 가치 경향도 아니고 일종의 도덕 척도도 아닌 개성특징과 특정된 환경 속에서 생성된 물질이다. 덧붙여 이 세계가 너무 평범하여 일종의 지혜와 환락 철학이 조절 역할을 해야 하고 혹은 이런 방탕과 이런 철학이 얽혀있는 것 같다. 만약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할 때 임소림 작품의 배경처리를 본다면 우리는 그 속의 논리 관계를 쉽게 알아낼 수 있고 그의 그림의 배경은 당연히 중국 전통 산천화의 의경이고 옛 그림의 구체화로부터 현재 작품의 점차적인 추상이다. 그는 특별히 성애와 천지 미가 서로 연관됨을 강조했고 침대 위에서의 풍경을 실외 자연으로 내밀었으며 산수와 잔디 등을 묘사하여 친밀한 접촉을 그 자신이 승인하는 건강한 서사로 만들어 성의 서로 다른 측면에서 자연의 미감을 드러냈다. 나유미의 자연 의향에 대한 섬세한 수식 방법은 마치 아담과 이브의 하체를 가려주는 무화과와도 같았고 이런 수식은 바로 신체와 성욕의 전형적인 일반적인 문화 표현 방식이다. 그러나 이는 곧바로 우리 시대 문화에 대한 모종의 익숙하고 진실된 묘사이며 또한 임소림이 북경으로 옮겨온 후 상태의 변화가 작품에서 표현된 것이다.

 

 

自我的風水 (3)_260x80cm_Oil on canvas 2007

 

 

   또한 위에서 말한 "낯선" 은 그가 신비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간과 공간, 사람과 자연 풍경 사이에 일종의 혼잡하고 미묘하고 부드러운 관계가 생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의 밀접한 관계는 분명하게 다른 점을 말살하고 대응을 없애려는 경향이 보이고 그들은 평등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화목하여 곧 영도로 떨어질 정도이다. 진실은 무엇인가? 표현이란 무엇인가 등등 이런 문제는 허공이란 형상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이런 인물 형상은 모두 명확한 시대 표기와 복장이 없으며 이는 그의 화술이 "흡사한 진실"에 대한 추구의 정도를 뛰어넘은 다음 새로운 언어환경 속에서의 자유롭게 넘나들고 합병하여 "불확정성"을 뚜렷하게 표현하는 역할인 종잡을 수 없는 무한한 변동을 표현했다. 예술이 표현하는 풍부성은 인간의 복잡함과 혼란스러움이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성의 기능일 뿐만 아니라 이런 성을 즐기는 인간의 생활환경이다.

   때문에 나는 그의 이번 작품집 명을 "백일몽"이라고 붙이고 싶다. "백일"과 "꿈" 의 수식 자체가 일종의 모순과 대립이며 백일몽이 꿈인 원인은 이것이 실제 현상과의 관계가 꿈과도 같은 정경이기 때문이고 또는 그 내용이 꿈과 같은 심리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환상과 공상에 빠져 있을 때 현실 세계의 영상이 희박해 졌고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도취된 형태였다. 꿈은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조미료이고 꿈속의 모든 것 혹은 사람으로 하여 도취되게 하거나 혹은 영혼을 흔들리게 하지만 모두 음미할 가치가 있다. 예술은 허망한 본질이 있고 더욱이 예술은 꿈과도 같이 현실 생활과 분리되어 있다. 예술은 곧 예술가, 관람가와 작품 속의 인물들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이며 "나"와 "그"의 관계 중에서 모종의 석방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런 "그"가 가성이기 때문에 관람가는 마음대로 자신의 내면 속 감정을 표현할 수 있고 타인과의 현실 속 관계에서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이런 가성적 세계 속에서 현실 생활 속의 부담을 멀리 할 수 있고 예술은 사회 현상 이외의 예속되지 않은 토지이며 인간이 기거할 수 있는 낙원이다.

2006.1.10

 

自我的風水 (4)_260x80cm_Oil on canvas 2007

 

 
 

 

 
 

vol. 20080314-런샤오린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