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효 개인 展
영광도서갤러리
2007. 4. 17(화) ▶ 2007. 4. 23(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전1동 397-55 영광도서4층 |051_816_9500,4
아스팔트 위를 배회하는 ‘닭둘기’가 이미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도시의 흉물인 것처럼, 철지난 광안리 바닷가 모래 위를 뒤뚱거리며 걸어다니는 갈매기들도 그다지 우아한 모양새를 보여주지 못한다. 사람이 다가가도 놀라지도 않고 단지 종종걸음을 칠 뿐인 이 새들은 이미 때가 뭍을 데로 뭍은 도시의 새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가끔 갑자기 때지어 하늘을 날아오를 때 보면 그래도 날렵한 자태를 보여주긴 하지만, 땅에 내려앉은 갈매기들은 아무래도 약간은 우스꽝스럽고 약간은 처량맞은 분위기를 풍긴다. 작가 박경효는 이 갈매기들을 주연으로 등장시킨다. 그나마 우아한 순간, 즉 날아다니는 순간이 아니라 마실 온 동네사람마냥 모래 위를 종종거리는 모양새다. 무언가 자기 집이 아닌 듯한 장소에서, 하지만 알고 보면 딱히 딴 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갈매기들인 것이다. 영락없이 사람을 닮았다. 연인처럼 둘이 나란히 걸어가기도 하고, 가족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하고, 어느 정도 친하기는 하지만 딱히 절친한 것도 아닌 지인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선은 낮고, 갈매기와 파도, 모래만 등장할 뿐, 바닷가의 다른 풍경들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는 석고보드 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를 직접 화면에 부착시켰는데, 석고보드와 모래에서 느껴지는 광물성의 거친 느낌은, 스산하다고 할 수 있는 철지난 관광지의 분위기를 잘 전달한다. 분명 바닷새인데도 너무 많은 시간을 모래 위에서 보내는 이 갈매기들, 사람들이 남긴 음식물을 뒤지고 다니는 도시의 방랑자들 같은 갈매기들의 이 모양새는, 철지난 관광지에서 느껴지는 적당히 애매하고 또 적당히 낭만적인 분위기와 매우 비슷하게 다가온다. 마치 인간사가 다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는 듯, 작가는 바닷가를 배회하는 갈매기들에 사람사는 모양새를 이입시킨다. 분명히 내 집인데도 왠지 남의 집 같고, 길인데도 어찌보면 내 집 같은, 그런 애매한 공간에서 풍기는 양가적 감정이 느껴진다.
작가는 화면에 눈 목 자(目)의 낙관을 찍고 ‘갈매기 둘 보다’ ‘갈매기 셋 보다’라는 글자를 써넣었는데, 이것은 한편으로 동양화적인 관조의 시선을 화면에 부여해준다. 그러니까 이 갈매기들에는 각자 사연이 있지만 거기에 우리가 깊이 개입해서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직접 듣는다기보다는, 어디까지나 한 폭의 풍경화처럼 대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철지난 바닷가를 서성이는 행위 자체가 이런 느낌을 준다. 그것은 일상의 복잡함에서 벗어난 여유의 시간이다. 하지만 이 바닷가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순수한 자연이 아닌 이상, 이 풍경은 단순히 멀리서만 바라보게 되는 그런 풍경일 수 없고,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구질구질한 모양새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갈매기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이 낮을 뿐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도 이런 느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바닷가의 다른 모습들이 생략되고 오로지 갈매기들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보는 사람들은 갈매기들의 모습 자체를 자연스럽게 오래 관찰하게 되고, 이런 관찰을 통해 이 풍경을 단순히 멀찍이 바라볼 수만이 있는 관조의 대상으로만 계속 대할 수 없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보다’라고 하는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점도 이런 애매한 혹은 양가적인 느낌과 관련이 있다. ‘갈매기 둘 보다’라고 했을 때, 갈매기 둘을 보는 것인지, 갈매기 둘이 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갈매기들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 존재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사는 거나, 사람 사는 거나, 하면서 오히려 갈매기들은 새우깡을 들고 바닷가에 모이는 사람들을 연민의 눈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선령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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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20070417-박경효 개인 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