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메일 - 최정윤 초대展 - 20070314
 

 
 

 

 

최정윤 초대展

 

- 劍의 노래 -

 

 

 

갤러리 담

 

2007. 3. 14(수)▶ 2007. 4. 2(월)

110-2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 7-1 | 02_738_2745

 

 

 

 

최정윤의 검들은 그 시원을 고조선의 비파형, 세형동검으로 볼 수 있는데, 청동검은 정복을 위한 수단뿐 아니라 지배계층의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함께 상징한다. 『산해경』「해외동경전(海外東經傳)」에서는 동이를 군자라 부르고 “그들은 옷을 입고, 관을 쓰고, 띠를 두르며 검을 찼다.”라고 하여, 검은 예禮의 상징이며 지배자의 상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평론가 안인기는“최정윤은 청동검의 형상을 빌어 고조선 청동기문명의 우수성과 파괴력이라는 무기로서 검의 기능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의기, 권위, 권능, 주술, 벽사, 과시, 수호, 응징의 신화체계를 가공한다. 즉 그의 검은 한편으로는 역사 기록 이전에 제작되어 사물로만 남은 우리민족의 황금시대를 복원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시간을 돌이키려는 낭만적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검들은 역사 복원의 무위와 황금시대의 상실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검이 구성하였던 기존의 상징구조를 해체하고자 한다. 최정윤이 만든 검은 실제 청동으로 주조한 것도 아니며 원래의 모양을 본 딴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검의 추상적 기억을 맑은 고딕으로 조작된 검의 신기루에 가깝다. 검의 신기루는 그 동안 검이 누린 권능과 힘, 정복과 승리의 상징을 맑은 고딕으로 삼으면서도 그로부터의 이탈한 것이다. ”고 말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흙으로 만들어진 검과 부드러운 물성을 가진 한지로 작업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최정윤(1964년 생)은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였으며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개인전을 가진 바 있으며, 그의 작품은 국무총리공관을 비롯하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있다.

 

劍의 形, 劍의 理致

 

유명한 <전쟁론>의 저자이자 나폴레옹의 침공으로부터 프로이센을 구한 전략가 칼 폰 클리우제비츠는 전쟁을 펜 대신 칼을 택한 정치의 연속으로 정의하였다. 칼의 정치라는 전쟁은 최고의 지략과 기술, 희생과 영광이 교차하는 극단적 대결에서의 승리를 목적으로 한다. 칼은 그 어원에서도 ‘이기다’의 뜻을 지닌 것이라고 하니 칼을 지닌다는 것은 곧 전쟁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면 그를 통한 군림과 지배의 효과가 동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사회로부터 칼은 단순한 무기의 기능을 넘어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칼은 돌과 땅의 의미를 공유한다. 칼은 돌의 옛말인 닫, 돋과 같은 어원이며 또한 땅을 뜻하는 닫, 따, 달 등의 어원과 같다. 칼, 돌, 땅의 어원적 유사성은 칼의 원형이 석기시대의 돌검이며 그것으로 땅과 생명을 수호하였음을 알게 한다. 즉 칼로 인해 수렵생활로부터 농경사회로 이행되었으며 칼은 땅이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발견하게 만든 특별한 사물이었다. 이처럼 칼이 땅의 가치를 깨닫게 한고 확산시킨 대상이었다는 면에서 흙을 빚어 검을 만든 최정윤의 작업들은 클라우제비츠처럼 칼의 파괴적 기능이 아닌 보다 근원적이고 생산적 기능과 관련된 기원을 추적하는 의미를 지닌다 할 것이다. 최정윤이 선보인 검들은 우리의 청동기시대를 구성하는 비파형, 세형동검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3천년 전의 시간을 회귀하는 최정윤의 청동기 시대 모티브는 1999년 첫 개인전의 ‘삼족기’작업 이후 지속된 공통점이다. 고대 중국 전설로부터 기원하여 종묘의식, 주술적 기원과 영혼의 위무를 목적으로 제작된 삼족기는 제국의 수호물이자 황위의 정통성과 벽사의 상징으로 후대에도 계속 제작되었다. 그것의 표면은 도철문, 뇌문등 다양한 모양으로 신령스러움을 더하고 상상의 괴수와 동물 형상들을 생겨 넣음으로써 중국 특유의 에너지와 힘을 느끼게 하였다. 최정윤이 삼족기를 차용하였던 것은 수천 년의 시간을 이겨낸 신비스러움과 퇴적된 시간이 표현하는 과거의 영화로움과 무상함에 대한 암시가 가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고대 삼족기의 원형과 유사한 형태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점차로 현대적 추상조각처럼 볼륨감을 강조하는 형태로 변형하였고 표면 문양이나 제례용기로서의 구조로부터도 이탈하였다. 작품 표면은 동록patina의 오랜 시간성을 암시하는 유약효과를 강조하였고 세 개의 다리라는 명명학적인 구조도 유지하였다. 최정윤이 도달한 최근의 작업은 삼족기 자체가 하나의 고대 생명체이거나 화석과 같은 생명의 흔적을 지닌 독자적 조형물로 매듭지으려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최정윤의 검의 형상으로 도약하였고 그것에서 어떠한 변화를 모색하고 잇다. 삼족기가 중국 청동기문화의 정수라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청동검에서 화려하게 꽃피었다. 칼은 양날의 검劍과 한 날의 도刀로 나뉘어지며 고대사회는 검이, 철기문명 이후로는 도가 주로 이용되었다.

 

검은 우리 고대사회의 신적 군장을 상징한다. 단군신화에서 검은 천손의 후예라는 징표로서 천부인天符印의 하나였다. 중국 고기의 하나인 <관자管子>에 따르면 그러한 검의 최초의 제작자는 동의족의 왕인 치우蚩尤였다고 하는데 축구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심벌로도 잘 알려진 치우는 배달국의 14대 천왕으로서 중국에서조차 군신으로 섬겨졌다. 이처럼 선민사상의 표상인 청동 검은 대륙을 넘나들던 민족의 기상과 고대사의 영화가 함께 자리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간직한 셈이다. 최정윤이 청동 검의 원형을 차용하기로 함으로써 그는 검의 형상적 상징성과 더불어 고대사의 비밀을 동시에 연상시키게 되었다. 이전 삼족기 작업에서 보였던 순수 조형적 번안과 변형과는 다른 차원의 조형의지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청동 검은 그것이 비록 삼천 년 이상의 역사를 거슬러가는 고대의 유물이지만 삼족기처럼 단순한 흥미거리를 벗어나는 우리나라의 실체인 것이다. 그는 청동 검의 형상을 빌어 고조선 청도기 문명의 우수성과 파괴력이라는 무기로서 검의 기능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의기, 권위, 권능, 주술, 벽사, 과시, 수호, 응징의 신화체계를 가공한다. 즉 최정윤의 검은 한편으로는 역사 기록 이전에 제작되어 사물로만 남은 우리민족의 황금시대를 복원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시간을 돌이키려는 낭만적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검들은 역사 복원의 무위와 황금시대의 상실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검이 구성하였던 기존의 상징구조를 해체하고자 한다. 앞서 논했듯이 최정윤이 만든 검은 실제 청동으로 주조하는 것도 아니며 원래의 권능과 침, 정복과 승리의 상징을 맑은 고딕으로 삼으면서도 그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최정윤의 검들은 청동기시대의 동검이 모형으로 삼았던 마제석검의 물성으로 제시됨으로써 이중 복제의 역설을 드러내었다. 부장품으로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닌 높은 단을 무대로 더욱 극적인 형태로 세워지거나 황금박편으로 씌움으로써 그 물신성을 극대화하였다. 검으로써만 검을 이길 수 있다는 교훈처럼 검의 신기루를 통해 오히려 실재하는 검의 환영은 재고될 수 있다. 이제 검은 농경사회의 정착을 이룬 힘의 원형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도의 실천을 검리劍理로 보아 살상과 파괴로부터 융화와 깨달음을 매개하는 구도의 수단으로 검을 사고했던 도교적 관점은 최정윤의 작업에도 발견된다. 풍진이 모여 돌이 되는 자연의 이치를 닮은 도예의 순리를 따르면서도 인위와 무상을 알리는 실천일 수 있음을 최정윤의 석검은 보여주고 있다.

안인기| 미술 비평

 

 

 

 
 

최정윤

개인전 6회

2004 금산갤러리(금산갤러리기획, 서울) | 2006 21C+葉갤러리(금산갤러리기획, 동경)

단체전 60여회

2006 Idea전(현대백화점, 서울) | ASTAIC-SCAPE전(성보갤러리, 서울) | 광화문국제아트페스티벌(세종문화회관, 서울) | 국립현대미술관신소장품2005전(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현재 : 서울대 대학원, 경기대 조형대학원, 충남대, 남서울대, 건국대 강사, 토회, 현대도예가회, 일레븐 회원

 
 

vol.20070314-최정윤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