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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 & 방정아 초대展
박상현_Andropogon brev
제비울 미술관
2007. 2. 15(목) ▶ 2007. 3. 25(일) 경기 과천시 갈현동 산 38-1 제비울미술관 | 02_3679_0011
박상현_Portulaca grand
■ 제1전시관
방정아 "너의 매력"展
니가 알지 못하는 너의 매력을 나는 안다.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의 가능성이라고, 나는 여겨버린다. 니가 나의 희망이 되어다오. - 방정아 -
박상현_Nandina
■ 전시 서문
나는 전에 언젠가 정아의 그림 <고독함의 상쾌한 매력>을 “내가 가지고 싶은 그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술 언저리에서 일한지 꽤 되었지만 그림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 데 말이다. “가지고 싶은 그림”이란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내 취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어울릴 예쁘장한 그림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 그림이 단순히 사람없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데도 굉장히 내밀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이 드는 그림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사실 정아의 그림은 보통 때 이 작품보다는 더 바깥과 다른 사람을 향해 있지만, 그 시선이 한낱 세태 스케치로 머물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삶의 밀도에 가닿는 그녀의 이런 내밀한 정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그림에는 황망하고 연약한 일상의 순간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안으면서도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허약한 토대를 후벼파는 날카로움이 있다. <넌, 누구냣>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처럼, 그것은 예기치 않은 맞닥뜨림에서 얻은 상처로도 표현되고, <남의 집>처럼, 갓 이사온 내 집에서 남의 집에 온 것처럼 덩그러니 앉아있는 그런 막막함으로도 표현된다. <건조한 너의 매력> <맹인 이씨>같이, 제일 최근에 그린 작품을 본다. 특유의 내밀함은 여전하고 세상의 아이러니함을 응시하는 따듯한 시선도 여전하지만, 화 면 가득 얽힌 선과 색깔로 그녀는 조금 더 먼 곳에서 자신만의 색다른 환상적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맹인 이씨가 상상한 물과 풀의 세상이나 바삭바삭 부서지는 낙엽의 세상처럼, 그녀는 사람들이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작은 구석에서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길어내 보여준다. 하지만 또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일상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조선령 |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박상현_Viola tricolor
■ 제2전시관
박상현 "Processing Plants"展 그동안 컴퓨터를 기반으로 한 테크놀로지 아트를 지향하는 작업을 주로 전시해 왔던 박상현이 평면작업을 선보인다. 1990년대 이후 미디어를 넘어 뉴미디어로 급격히 전환되면서 몇몇 예술가들은 첨단기술이라는 산업적 이벤트와 내면의 성찰을 확실히 구분 지으며 환영적 이미지의 내적 논리를 탐구하기 시작 하였고. 박상현은 그 몇 안 되는 작가였기에 이번 사진작업이 의외이면서 신선하다. 이번 작품은 사회적 논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의 상상계를 사진과 비쥬얼 프로그램이라는 ‘필터’를 통해 ‘오퍼레이션’하면서 실재 같은 환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전반적인 작업의 주제는 ‘불확정성(indeterminacy)이다. 불확정성은 명백하지 못하고 무지에 의한 불능이 아니라, 비결정적이란 의미에 가깝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다양한 원인과 정의(定義)가 가능하고 대상의 의미는 다수 또는 제 3자의 개입 속에 다변적, 다의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박상현의 작업에선 이미 닳아버렸거나 끝내 만나지도 못할 ‘시간’이라는 제3자를 통해 공간의 오브젝트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있다. 조형적인 면에서는 불연속적이고, 곡해, 변형, 혼성과 같은 해체주의적인 특징이 보여지는 듯하지만, 중심맥락은 오히려 60년대 후반 상호작용으로 인한 가변적 변화를 계기로 불변의 영역을 변형과 끊임없는 생성이 작용하는 곳으로 확장시키며 다원화될 사회를 예고했던 후기구조조의의 자율성이 시각적으로 집합되었다 보인다. 작가의 후기구조조의적인 유기적 ,비선형적 관점은 “Processing Plants”이란 스스로가 붙인 전시제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방정아_또 다른 나
방정아_맹인 이씨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는 무리수이다. 무리수(無理數)는 시각적으로는 범위가 정해져 있는데 수학적으로 정확한 값을 구하기 위해 끝임 없이 프로세싱되고있다. 수학자 데데킨트는 유리수의 절단을 통해 유리수와 무리수를 실수로서 동일한 정의 밑에서 다루었다. 혼돈스러움을 피하는 인간의 경향은 자연의 법칙과 반대로 다양한 인식과 정의를 만들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실수화(實數化)하려는 반엔트로피적 특징을 갖는다. 하긴 식물이 성장 할 때는 모르지만 생명을 다하고 재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숙명은 지극히 엔트로피적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타인이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한국의 낯선 도시는 Processing Plants이다. 정의된 공간이 아닌 끊임없이 다르게 계산되어 등장하는 3차원의 구조물들과 공간은 꼭짓점과 꼭짓점의 연결이 여전히 프로쎄스 되고 있는 식물들이다.
아이러니하게 그 타인은 이런 인식의 증명을 위해 수학적 한계를 시각적으로 정의하는 광학기계를 사용하고 또 반엔트로피의 선봉에 있는 디지털 테크닉을 이용한다.... 작가 노트 中
방정아_둘러서 온 길
무리수란 순환하지 않는 무한 소수이며, 궁극적으로는 유리수가 도달해야 될 수이다. 이 무리수의 상징적 기호인 √ (루트)를 작품제목 앞에 붙여 유리수와 같이 확정적인 불변체였던 대상을 무리수처럼 지각상 불확정적인 단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건은 결론이 아니라 확정되고 있는 과정 즉 processing 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작가의 의도는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한 단계 뛰어넘는다. 식물의 학명들을(Eunoymus(사철나무),안개꽃(Gypsophila elegans), Mysotis alpestris (물망초) Narcissus(수선화) Syringa vulgaris(라일락)....) 도시의 인공물에 하나씩 이름지어주는 작업 또한 꽃이라는 낭만적인 문자가 전달하는 획일적인 의미체계와 태양 없이도 자라며 영원히 썩지 않는 숲인 고층빌딩이란 시각적 대상이 결합되면서 각각의 기호가 지시하는 특정의미를 전복시키고 그 기호체계 이면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함을 의도하는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시간, 공간, 사건, 사물을 자율적인 인식력을 통해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있으며 현실의 복합적인 의미들을 다각도에서 접근하여 새로운 질서체계를 만들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제비울 미술관 학예연구원
방정아_없으면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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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20070215-박상현 & 방정아 초대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