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희 개인展

 

- 조선전도에 핀 봄, 여름, 가을, 겨울...다시 봄 -

 

 

 

노암갤러리

 

2006. 5. 31(수) ▶ 2006. 6. 6(화)

opening: 2006. 5. 31(수) 오후 6:00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33 노암갤러리 | 02-720-2235

 

 

 

 

봄이 물씬 올라서 복숭아꽃 몽오리와 복분자나무에 싹이 틈을 느낀다.

정신없이 추운 작업실에서 항상 봄을 느끼고 맞는다.

그와 같이 어느덧 봄이 지나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온다.

또 다시 봄이 온다.

조선전도에 핀 사계절

또 다시 봄을 그려본다.

-작가노트-

 

 

 

 

■ 계절을 여행하는 아름다운 모험 ■

 

박순영 | 노암갤러리 큐레이터

화가나 문필가는 건축가와는 달리 흰 평면, 여백 또는 백지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한다고 한다. 창작자는 표현에 대한 의지나 욕구로 인해 빈 여백 앞에 설 수밖에 없는데, 막상 그 의지를 끄집어내려 하면 머릿속부터가 흰 백지 상태가 되곤 한다. 개념을 만드는 것은 어떻게든 머리의 능력이라 하더라도, 말하거나 쓰거나 그리는 여러 몸짓들은 말 그대로 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머리에 의해 몸이 움직인다고들 생각해왔다. 그러나 창작할 때나 무심코 관람할 때나 예술에서는 상황이 좀 다르다. 어느 철학자는 “어떤 것이 예술작품으로 간주되는 순간 어떤 해석에 지배받게 된다” 고도 말하지만, 어떤 관점에서만 그럴 뿐이다. 예술은 감각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표현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머리보다는 몸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어떤 얼굴을 그리게 될 때 누구든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어느 철학자의 말도 따져보면, 해석이전의 것들이 이미 있다고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작품을 예술이게 하는 것은 해석이전의 것이다. 여하튼 백지의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머리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그 두려움이란 머리로부터 발생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텅빈 여백.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여백을 대하는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잘 알다시피, 서양은 채워야 하는 것으로, 동양은 비워야 하는 것으로 대했다. 여백은 서양의 사고 체계에서는 비어있는 것이고 후자에서는 이미 채워져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빈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서양은 머리에 의존했고, 동양은 몸에 의존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원근법까지 만들었지만, 동양에서는 선 하나로 족했다. 근대 이후로 서양은 원근법적인 사고를 반성하면서 평면의 의미를 되찾고 있다.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큐비스트들의 꼴라쥬였다. 그것은 브라크의 표현대로 ‘위대한 모험’이었다. 반면, 그린버그는 평면에 나타난 오브제를 ‘침입자’로 지칭하면서 부정적, 또는 저급한 것으로 판정하면서 평평한 화면과 조각적 효과 사이에 행해지는 자족적인 대화에 불과하다고 까지 언급했다. 아마도 평면성만이 회화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선언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스승인 한스 호프만이 말한 평면성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회화의 평면은 “2차원성을 파괴하고 3차원성으로 2차원성을 재창조하는 것”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호프만에게 큐비즘은 저부조의 공간감에 일치하는 평면적인 표면의 긴장을 잘 드러낸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사고는 재미있게도 동양의 여백에 대한 태도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일까. 수묵과 채색으로 그려진 종이에 꼴라쥬 기법을 사용하는 작가가 있다. 쉽게 생각해서 동양의 채색기법과 서양의 기법을 결합한 것으로, 또는 섞어 놓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차용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형식만의 유사함을 통해 작품을 대하는 태도이므로 지양해야 할 것 같다. 동양화의 여백에 오브제를 붙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서양은 재현을 거부하려는 태도, 즉 선을 통해 채색면을 파괴하거나, 조각적 구성에 의해 광학적인 환영을 파괴하고, 형상과 배경의 대립을 해소하려는 태도에서 나타난 것이지만, 어찌됐든 간에 평면에 환영을 만들어야 한다는, 즉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면서 표현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큐비스트들의 꼴라쥬와 이준희 작가의 그것은 의도나 원인은 다르지만, 여백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동일하다.

 

 

 

 

이준희 작가의 작품에서 재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단지 물이 흐르면서 물길이 만들어지듯이, 또는 물길 따라서 물이 흐르듯이 작가는 여백에 선을 긋고, 자연물들이 자신을 드러내듯이 면을 만들며, 바람이 지나가면서 형태를 흩으러놓듯이 흔적들을 지운다. 그리고 화폭위에서는 작가 자신의 취향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다시 봄>연작은 회화의 표현과 맞아떨어지는 자연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연작은 우리나라의 옛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 계절을 상징하는 꽃들을 그렸다. 작품 <대동여지도에 목련이 움트다>는 분홍색 한지에 아직 피기전의 흰 목련이 그려져 있는데, 봄에 대한 작가의 심상이 분홍인지 흰 목련에는 분홍빛이 감돌고, 분홍으로 뒤덮인 여백은 마치 꽃의 분홍기운이 화폭을 적신 듯하다. <동국여지도에 핀 우산국의 여름>의 풍경은 무척시원하다. 여름의 감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면은 과감히 억제되고, 선은 아래위로 힘차게 흐른다. 푸른 파초의 시원하게 뻗은 필력은 지도의 선과 형태에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다. <조선전도의 가을국화>에는 국화가 보랏빛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옆에 붙여진 보라색 종이로 인해 생생한 느낌이 두드러진다. <해좌전도의 설중매>에서 그려진 눈꽃들은 마치 겨울의 감성이 붓끝을 타고 지도 위에 떨어진 듯하고 붙여진 붉은종이는 그대로 동백꽃이 된다. 한 계절의 순환을 마치고 또다시 찾아든 <...다시 봄이 왔다>에는 활짝 핀 목련이 그려져 있다. 계절의 순환은 지도의 선과 필묵의 선과 닮아있다. 이번 전시에는 고지도와 함께 지도가 그려진 달력을 주소재로 하고 있는데, 달력의 숫자들이나 문자들이 흐릿하거나 거의 안보일 정도로 지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그 숫자들이 삶의 괘나 흔적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듯, 오히려 물의 흐르는 표면으로 대체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려 하는 듯하다. 그 위에 그려진 동백꽃은 계절의 순환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계절을 뽐내듯 그 붉음을 표현하면서, 연두색 선들의 자유로운 리듬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모든 것이 예쁘다"라고 팝아트의 거장인 워홀은 말했다. 모든 것을 예술이라 선언하자는 워홀의 말처럼, 작가 이준희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서 미를 찾는다. 1회용 커피 컵홀더, 달력 포장박스, 화장품 포장박스 등등...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물건들이나 버려질 포장지의 디자인에서 얻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들을 작가는 수집하고 조합하면서 예술품으로 만들고자 한다. 사실 모든 자연물과 인공물에는 예술적인 것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는 작가의 팝아트적인 태도에서 삶을 아름답게 대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을 배울 수 있다.

 

 

 
 

 

 
 

vol.20060531-이준희 개인展